‘철수와 영희’는 인천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오석근의 종합예술작품이다. 그것은 한국의 기성세대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옛 초등교과서 속의 인물들을 현실 한가운데에 출현시켜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을 일련의 사진 속에 담았다. 2006년에서 2008년 사이에 제작된 이 작품들 속의 철수와 영희는 정겹기는커녕 생소하고 혐오스러우며 심지어는 섬뜩하다. 철수와 영희의 가면을 쓴 그들은 장롱 속에, 담벼락 앞에, 지붕 위에, 건물 옥상에, 다리 밑에, 야산에, 아파트 구석의 음지에, 심지어 시위 현장이나 바다 수면에, 기중기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느닷없이 출현한다. 우리가 아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그대로 지닌 이 악동들은 오염된 환경에서 뛰어 놀고,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도색잡지를 훔쳐보며, 으슥한 곳에서 서로 금지된 장난을 즐긴다. 함께 서서 소변도 본다. 교과서의 정형을 벗어나 탈선을 일삼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우울하다. 시쳇말로 ‘웃프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어울리는 것 같다.

미메시스, 즉 창조적 모방이란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현실이 너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꾸로 너무 비루하기 때문에 현실을 창조적으로 왜곡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추악하고 비참한 현실도 이야기로 엮이고 나면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하고. 심지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은 문학이 아니다. 사진도 현실을 모방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사진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진 속 인물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이야기가 중단되어버림으로써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현실이 남긴 흔적이다. 마치 세밀한 동판화가 종이를 대고 문질러대야 윤곽을 드러내듯이 현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실의 참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피사체의 침묵을 통해 폭로된다. ‘철수와 영희’도 비록 연극적이기는 하지만 무언가의 흔적을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가면 아래 꼭꼭 감추어두었던 우리 자신의 상처 난 얼굴이다. 그것은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들쑤셔온 뼈아픈 과거를 환기시킨다.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감추는 도구였던 철수와 영희의 가면이 어느덧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민낯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소위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이 하늘 높이 치켜드는 태극기도 실은 철수와 영희의 가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분들이 대변하려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과거는 과연 그분들이 대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식민 통치를 겪은 나라 중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세계 유일의 나라라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성공 스토리는 정녕 그분들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감추는가? 혹여 시간이 가도 떨칠 수 없는 죄책감이나 수치심, 고통과 절망을 이런 식으로 위장하는 것은 아닌가? 진실로 당신들의 눈물겨운 고생을 후세대들에게 알려주시려거든 소위 종북좌파 척결에 집착하기보다는 이 자랑스러운 선진 조국에서도 여전히 고생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좀 더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동참하셔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인간 삶의 근원적 비극성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고등 종교의 기본원리다. 어리석은 인간은 세속의 삶 속에서는 절망에서 헤어날 길이 없기에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국가가 성공을 했든 못했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은 모두가 불완전하고 취약할 뿐이다. 과연 그 누구의 삶이 아무런 회한 없이 영광스럽다는 말인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이 겪은 박정희 시대는 정말로 그렇게 아름다웠는가? 결국 나라가 발전했으니 좋았다고 기억해야 옳은가? 실로 진실과 대면하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말쑥한 가면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로 위장하면 할수록 뼈아픈 과거는 더욱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한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저 껍데기뿐인 자부심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과거를 겸허하게 되돌아봄으로써 미래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다.

1972년 작품인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이탈리아 문학가 이탈로 칼비노는 마르코 폴로와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의 대화를 연출한다. 칸은 거드름을 피우며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도시를 묘사하고는 그런 도시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명한다. 마르코 폴로는 늘 그래 왔듯이 능숙하게 응수한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조만간 저는 틀림없이 그 항구에서 배를 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폐하께 그 도시에 대해 보고하러 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이 비범한 여행자는 무엄하게도 황제의 구태의연한 이야기에 일침을 가하며 아집을 버리고 세상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변한다. “도시는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부산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