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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홍역’ 치르는 홍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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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을 치르다’라는 말이 있다. 몹시 애를 먹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쓰는 관용어다. 홍역이 얼마나 독한 병이었으면 이런 말이 생겼겠는가. 옛날에는 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서운 질병이었다. 한 사람만 걸려도 그 지역이 줄초상을 치렀다. 조선 시대에는 홍역이 창궐할 때마다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인 2001년에도 우리나라에 홍역이 유행해 5만 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런 홍역을 겁내지 않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요인은 예방 접종이었다. 백신으로 예방하면서 면역을 얻게 돼 사망자 수가 급격히 줄었다. 홍역은 한 번 걸린 뒤 회복된 사람은 평생 다시 걸리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83년부터 의무적으로 1회 접종을 실시했고, 1997년부터는 2회 접종으로 강화했다.

이렇게 백신 접종이 체계적으로 실시되면서 홍역은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후진국형’ 감염병으로 치부됐다. 급기야 세계보건기구(WHO)와 팬아메리카보건기구(PAHO)는 2016년 9월 27일 아메리카 대륙을 세계 최초로 홍역 소멸 지역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2014년 WHO로부터 퇴치 인증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니 홍역은 이제 남의 일쯤으로 여기게 됐다.

그런 홍역으로 요즘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만이 아니다. 특히 ‘홍역 완전 퇴치 국가’로 분류됐던 미국의 워싱턴주 남부 클라크카운티에서는 최근 35명의 홍역 환자가 집단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워싱턴 주지사는 공중보건 응급상황을 선포하기도 했다. 유럽의 경우 지난해 상반기에만 4만여 명이 걸려 홍역 백신 접종 개시 이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으로 58명이나 걸렸다. 당연히 과거 아메리카 홍역 소멸 선언이 성급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인간의 자만과 자아도취에 대한 경고인가. 최근 유행하는 홍역의 정확한 감염 경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홍역 백신 접종률은 지금도 낮고, 홍역으로 인한 어린이 사망률이 높다. 게다가 홍역은 감염성이 강하고, 해외 여행은 급증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최근 홍역 바이러스는 사람의 이동으로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자기 공간만 깨끗하게 지켰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는 역시 하나였다.

정순백 논설위원 sbj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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