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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만 원짜리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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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번성했으나 이제는 좋은 시절이 지나간 곳에 가볼라치면 흔하게 듣는 말이 있다. “그때에는 동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니까…”다. 개가 땅에 떨어진 돈을 함부로 다뤄도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잘살았는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표현. 그래서인지 1960, 70년대에 고래잡이로 명성을 떨쳤던 울산 장생포에는 만 원짜리 지폐를 문 개 조형물이 실제로 세워져 있다.

   
1만 원권 지폐가 나온 때는 1973년이다. 탄생 배경도 흥미롭다. 애초는 1972년 발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폐 앞면에 석굴암이, 뒷면에 불국사가 그려져 있다는 점을 들어 일부 종교계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제품은 폐기되고 말았다. 정부는 결국 뒷말이 없도록 세종대왕 얼굴이 도안된 지폐를 이듬해 내놨다.

만 원짜리 지폐는 한때 ‘뇌물 수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도 얻었다. 경로 추적이 가능한 수표가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뇌물로 활용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1만 원권이 빈자리를 메웠다. 당시 검찰의 이런저런 뇌물사건 조사 결과에는 사과 상자에 1만 원권을 최대 5억 원까지 담을 수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런 ‘명성’도 부피가 가벼운 5만 원권 지폐가 2009년 발행됨에 따라 과거 일이 돼버렸다.

1만 원권에 대한 ‘천대’는 최근 더 심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장수를 기준으로 할 때 지난해 우리나라의 지폐 유통 비율은 5만 원권 35.8%, 1000원 권 30.2%, 1만 원권 28.7%로 집계됐다. 1000원권 지폐 유통이 1만 원권을 앞지른 것은 1986년 이후 22년 만이다. 금융권에서는 5만 원권은 휴대가 간편하고, 1000원권은 소액 결제 수요가 여전하기 때문에 사용빈도가 높지만 1만 원권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처지여서 외면을 받는 것으로 분석했다.

반면 이런 이유로 인해 만 원짜리 지폐가 발행 후 환수될 때까지 걸리는 유통수명은 121개월로 가장 길었다. 이에 비해 5000원 권은 43개월, 1000원 권은 52개월로 나타났다. 발행 연도가 10년 남짓한 5만 원권의 수명은 이번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세상 무슨 일이든 부침이 있게 마련. 한때 우리나라 ‘돈 흐름’의 뼈대 역을 하던 만 원짜리 지폐의 위상도 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터다. 하긴 지금은 전자 결제 보편화에다 가상화폐마저 등장하는 바람에 아예 지폐 무용론까지 나오는 시대가 아니던가.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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