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의 국가대항전 출전사 중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 게 있다. ‘돌부처’ 이창호 9단이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의 1~6회 대회를 통틀어 거둔 14연승이 그것이다.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이 무대는 한국·중국·일본에서 대표 프로기사 5명이 각각 출전해 이기면 계속 두고, 지면 바로 탈락하는 연승제 방식. 이 같은 외나무다리 승부에서 이창호는 상대팀 14명과 맞붙어 모두 이기고, 우리나라의 6차례 연속 우승을 결정짓는 신화를 이뤘다.

그중에서도 2004년 6회 대회가 최고 압권이었다. 당시 한국팀은 4명이 줄줄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창호가 최후의 주자로 나섰다. 반면 중국은 3명, 일본은 2명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만큼 한국의 우승확률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이 9단이 예상을 깨고 5명을 차례로 꺾는 대역전 드라마를 썼다.

‘토종 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9단이 작성한 기록도 그에 못지 않는다. 그는 이 대회 전신 격인 진로배 세계최강전의 1997년 제5회 대회에서 혼자 중·일의 내로라 하는 고수 9명을 연거푸 꺾고 한국의 대회 5연패 금자탑을 쌓았다. 여러 시즌이 아닌 단일 시즌 대회에서만 9연승을 올렸으니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랬던 한국이 올해 20회 세계최강전 대회에서는 최악의 수모를 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제 부산 농심호텔의 제7대국에서 ‘쎈돌’ 이세돌 9단이 중국 기사에 패해 박정환 9단만 남게 됐다. 앞서 4명이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터라, 박정환마저 지면 한국은 전패다. 그간 19번의 대회에서 한국은 12차례 패권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근래에는 15~18회 4년 연속 우승한 중국에 밀리는 모양새다. 19회 때 되찾은 우승컵이 위태로울뿐 아니라 일본에도 승수가 뒤지니 사상 처음 최하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이런 판에 우리나라 바둑의 총본산인 한국기원(棋院)은 비상 상황이다. 전 총재의 ‘낙하산 인사’ 논란에다 지난 4월 외국인 여성 기사의 ‘미투’ 폭로, 프로기사들의 반발 등으로 내홍에 휩싸였다. 급기야 이달 초 집행부 공백이란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가 얼마 전 비상대책위가 꾸려졌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다. 바둑 격언 중에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가 있다. 자기 돌(진영)이 튼실해야 상대 돌을 잡을 수 있다는 뜻. 집안이 혼란스러우니 바깥 대회 성적도 신통찮지 않나 싶다. 바둑의 요체인 평정심을 되찾아야 할 때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