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제신보 가요대상’이라는 국내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상이 있었다. 국제신문의 전신인 국제신보(1950~1977)가 1964년 제정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1916~1998) 씨가 1965년 제2회 대상을 수상했고, 지난 8월 24일 작고한 ‘하숙생’의 주인공 최희준(1936~2018) 씨는 1966년 제3회 대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는 ‘동숙의 노래’로 혜성처럼 나타난 부산 출신 17세 소녀 문주란(69) 씨가 신인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작사·작곡 부문 경쟁도 치열했는데, 1964년 제1회 작사부문 수상자는 한명숙의 ‘그리운 얼굴’ 노랫말을 지은 하중희(1935~2004) 씨였다.

가을만 되면 자주 듣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의 작사가이기도 한 하 씨는 그 직전인 1963년에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저음 가수 남일해(80) 씨가 부른 ‘빨간 구두 아가씨’ 였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 한 번쯤 뒤돌아 볼 만도 한데 / 발걸음만 하나 둘 세며 가는지 / 빨간 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 //’.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노래다. 노랫말 탄생 이야기도 재미있다. 당시 하 씨가 근무하던 KBS 방송국은 서울 남산에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남산 오솔길을 걷다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앞서 가던 아가씨를 발견했다.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가씨는 끝내 보여주지 않고 제 갈길만 갔다. 그 느낌을 잊을세라 급히 노랫말을 쓴 하 씨는 같은 방송국 악단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김인배(1932~2018) 씨에게 곡을 부탁했다.

트로트가 대세이던 1960년대 초반 대중음악계에서 경쾌한 스윙 리듬의 ‘빨간 구두 아가씨’는 말 그대로 대히트를 쳤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 멋쟁이 여성들 사이에선 빨간 하이힐 열풍이 불었다. 빨간 구두 품절 사태도 빚어졌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히트로 노랑 열풍이 불던 거리엔 빨강 물결이 넘쳤다. 반공을 강조하던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사회풍조와 퇴폐적 분위기까지 더해져 일반 패션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빨간색’을 비로소 햇볕 아래로 끌어낸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노래 하나가 한국사회의 패션 트렌드는 물론이고 사회적 금기의 벽까지 허문 셈이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인배 씨가 지난 6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제1회 국제신보 가요대상 작사상 수상곡 ‘그리운 얼굴’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명복을 빈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