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가 자살골을 넣는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또 불 끄러 간 소방수가 불을 지른다면? 보나 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핀잔을 들을 게 뻔하다. 있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있어선 안 될 일이어서다. 한데 그런 기막힌 일이 국민의 마지막 보루라는 사법부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보란듯이 진행되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립을 위해 권력과 재판거래를 했다는 사법 농단 의혹이 그 비극의 원작이라면, ‘김명수 사법부’의 ‘제 식구 감싸기’식 대처는 속편이다.
사법 농단은 삼권분립과 법치를 뒤흔드는 국기 문란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재판거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재판거래, 통진당 지방의원 지위확인소송 개입, ‘부산 스폰서 판사’ 사건 무마 등등. 검찰이 수사 중인 사법 농단 의혹 사건들 하나 하나가 대한민국 사법부 독립의 불완전성과 사법이성의 부재를 증언한다.
이는 우리 근대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해방 후 친일 단죄에 실패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강제징용 재판거래 사건이 그렇다. 검찰은 최근 양승태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낸 일제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대법원 담당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한 진술을 확보했다. “법원은 정부와 별개이며, 군주로부터 독립돼 있다.” 네덜란드가 세계 최대 무역제국으로 부상했던 동인을 사법부의 완전한 독립이 낳은 국제적 신용 보장에서 찾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진단(‘사피엔스’)에서도 그 한계가 대비적으로 드러난다. 사법 농단에 따른 국가 위기의 연원을 보여주는 역사적 본보기다.
사법 농단 의혹 사건은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것보다 더 많다. 제18대 대선 직후인 2013년 1월, 시민 6000여 명이 제기한 대선무효확인소송이 그 하나다. 양승태 대법원은 ‘180일 이내’에 처리해야 하는 공직선거법 규정을 외면한 채 4년4개월 동안 심리 한 번 열지 않은 채 이 사건을 방치했다. 그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재판으로 구할 실익이 없다”며 각하해버렸다. 김명수 대법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5월, 이 소송 제기자들이 청구한 재심을 지금까지 심리하지 않고 있다. 깊고 질긴 사법 농단의 생태계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재판거래 피의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이나 구속영장 청구를 줄줄이 기각하는 김명수 사법부 법관들의 행태는 국민의 법감정과 담을 쌓은 게 아닌지 의심케 한다. 양승태 대법원에서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유해용 변호사에 대한 법원의 영장심사는 그 절정이다. 검찰은 유 변호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그가 퇴직 때 무단 반출한 재판거래 증거 문건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당시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압수수색영장의 범위가 특허소송 관련 보고서 1건으로 제한됐던 터라 검찰은 다른 문건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다시 청구했다.
법원은 여지없이 기각했고, 검찰은 “증거인멸 기회를 준다”며 두 차례 더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검찰에 문건들을 인멸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유 변호사는 호기를 만났다는 듯 문건들을 파기해버렸다. 법원은 그런 유 변호사에 대해 청구한 검찰의 구속영장마저 기각했다. 사법 농단 수사를 방해하려는 노골적인 시도나 다름없다. 압수수색영장 기각률이 5.2%에 불과한 일반사건과 대조적으로 사법 농단 사건은 90%에 이르는 데서도 법원의 의중이 감지된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더욱이 김명수 대법원의 대법관들은 김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발언한 지 얼마 안 돼 회의를 열어 “재판거래는 없었다”며 오불관언하는 판이다. ‘양심’을 ‘주관주의’로, ‘독립’을 ‘조직 이기주의’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법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재판에 대한 신뢰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니, 사법의 위기이자 정의의 위기요 국가의 위기다.” 이러니 전국 대학의 법학교수들이 더는 학생들에게 대법원 판례를 가르치면서 사법정의를 강조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창설 70주년을 맞은 우리 사법부의 현실이다.
더 난감한 점은 이런 사법부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심판한다는 거다. 모순도 이토록 지독한 모순이 있을까. 법학교수들은 사법 농단 연루 법관들의 탄핵과 특별검사에 준하는 특별재판부 설치 등을 촉구했다. 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사법 농단의 근본원인은 법관 인사를 좌우하는 ‘제왕적 대법원장 제도’에 있다. 그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개헌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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