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뜨거운 항일운동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경남 밀양을 찾은 적이 있다. 1920년 12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린 최수봉 의사, 의열단 김원봉 단장 등 항일운동에 나섰던 독립투사의 역사가 내이동 우체국 인근에 조성된 항일운동 테마거리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또 밀양시립박물관에는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있었는데 간담이 서늘해졌을 일본경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밀양시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1920년 9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한 부산 출신의 박재혁 의사다. 그의 항일투쟁은 석 달 뒤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그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4대 의거를 벌인 인물로 꼽히지만 그동안 국가도 지역도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못했다. 지난해 박재혁 의사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면서 박 의사의 행적을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생가와 기념관을 건립하자며 부산시 국가보훈처 동구 등이 적극 나선 뒤 1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없다. 더불어민주당 김해영(연제) 국회의원까지 나서 국가보훈처로부터 박 의사 기념사업비 지원 약속을 끌어냈지만 기관 간 책임 떠넘기기에 복원 사업은 탄력을 받지 못했다.

결정적인 걸림돌은 2004년 7월 수립된 국고보조금 정비방안과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박 의사 생가 복원 같은 현충시설 사업이 지방이양사무로 결정된 것이다. 권한만 주고 예산은 주지 않는 비정상적인 법이다. 민간이 사업 주체가 될 때는 민간경상보조금을 30%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돈이 궁한 지자체와 민간 모두에게 족쇄를 씌우는 법에 불과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생색을 낼 대로 낸 부산시와 국가보훈처가 이 같은 법도 모른 채 입으로만 박재혁을 추념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무관심의 흔적은 또 있다. 박 의사 부친 이름과 순국일 등 기초 자료조차도 오류 투성이로 확인되는가 하면 동구는 지난 3월 범일동에 있던 박 의사 상반신 벽화가 훼손되자 아예 페인트로 덮어버렸다. 보다 못한 개성고 총동문회(박재혁 의사는 개성고의 전신인 부산상고 4회 졸업생)가 평전 발행에 앞장서고, 동구문화원 류종현 전문위원은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추적한 책을 출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최형욱 동구청장이 벽화 훼손 사실을 알고 1억 원을 투입해 벽화 복원과 지역 독립투사를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최 구청장은 “부산 출신 독립 운동가 81명 중 동구 출신이 29명으로 동구는 독립투쟁의 역사와 인연이 깊다”며 “연구자 등 전문가 집담회를 통해 박 의사 등 지역 독립투사를 기리는 사업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친일파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많은 사람이 운명처럼 그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다. 어떤 이는 이름을 남겼지만 어떤 이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하물며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다.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한다”고 했다. 박재혁 의사의 처지가 이와 같다. 마지막 표현은 이렇게 바뀌었으면 한다.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은 부산시(혹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출발한다”고.

사회1부 차장 defiant@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