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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희망가를 불러볼까 /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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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5-04 20:42:05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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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친구 아버지 중에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집에 가면 우리는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 발소리를 한껏 죽이고 다녔다. 그가 우리에게 무섭게 군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침울한 분위기와 냉담한 표정에 감히 인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구의 엄마도, 오빠도 그의 웃음기 없는 얼굴에 숨을 죽이고 사는 눈치였다.

어느 날 친구는 제 아버지에게 북쪽에 두고 온 부모님과 또 다른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비밀을 말해주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자주 술을 마시고 운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서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거라고도 했다. 그때, 친구의 표정은 꽤 진지했지만 나는 혼란스러웠다. 당시 우리는 북쪽에는 온몸이 빨갛든가 머리에 빨간 뿔이 돋은 ‘빨갱이’들이 산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의 가족이 그쪽에 살고 있다니 꾸며낸 이야기인가 싶은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들어서였다.

그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을 지나 ‘빨갱이’의 의미가 뭔지를 알게 될 즈음에야 주변에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잔한 눈빛으로 먼 곳을 자주 바라보던 외할머니의 가슴에도 멍 자국이 있었다. 방학 때 가 뵈면 외할머니의 눈길은 곧잘 드넓은 벌 너머 신작로께를 더듬곤 했다. 외할머니의 습관적인 그 모습은 큰외삼촌 때문이었다. 큰외삼촌은 일제강점기, 돈을 벌겠다고 고향을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다. 먼 훗날, 조총련고향방문단에 끼어 겨우 고향을 찾았지만 외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십대에 떠나 일흔 넘은 나이에야 간신히 고향의 흙을 만지게 된 외삼촌은 오직 살기 위해 택한 길이 이렇듯 회한에 사무치는 일로 남을 줄 몰랐다며 많이도 우셨다. 그 후, 그 슬픔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분단민족으로서 겪는 사람들의 아픔이 종종 가슴을 짓눌렀다. 그것이 친구의 아버지와 나의 외삼촌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게 했고, 등단작이 되었다.

우리는 남과 북이 갈린 후 줄곧 국가의 이념이 한 개인의 운명을 갈라놓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 그 멍에는 많이 엷어졌지만 여전히 색깔 논쟁은 유효하고, 정치권에서는 끈질기게 그 프레임을 이용한다. 그것은 아무리 지겨워도 남과 북이 나뉘어 있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대립인 것이다.

그런데 지난달 27일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악수를 나누면서 새 희망이 엿보였다. 2000년대 들어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임 대통령이 북쪽의 수장을 만나 잠시 희망적일 때도 있었지만 그들이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는 바람에 실망감만 남았다. 이번에도 경계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지만 또다시 기대를 해보는 것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때문이다.

그동안 호전적인 이미지로만 부각되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마주 앉았을 때, 그가 우리와 피부 색깔이 같고, 생긴 것도 같고,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던 것은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랜만에 만난 형과 아우처럼 편해 보여서였다. 녹음 사이로 새소리가 들려오고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데 아무도 배석하지 않은 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오후에 두 정상은 올해 안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 ‘판문점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에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합의도 했다. 그 말만 갖고는 핵 폐기에 대한 진정성이 있느냐는 의심도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전위적으로 흘러가는 이 역사적인 상황을 굳이 왜곡하고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과 북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게 된다면 그동안 흘린 민초들의 눈물이 그나마 빛나지 않을까. 일개 장삼이사의 바람은 오직 하나다. 남과 북이 그동안의 대립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사이 좋은 이웃이 되어 많은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발전하여 동북아에서 우뚝 서는 한민족이 되는 것.

실로 평생 믿지 못하던 상대를 믿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가 저지른 나쁜 짓과 지키지 않았던 약속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어렵사리 낸 용기가 무모한 만용이 되어 내 눈을 찌를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는 터닝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 포착하여 방향을 바꿀 줄 아는 것이 능력이고 용기이다. 지금은 모두 마음을 모아 그 방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우리가 상대의 무장해제를 위해 택한 방법은 바람과 햇볕 중 햇볕이다. 그 햇볕이 부디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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