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저기 봐요, 황매화! 너무 이쁘죠?”

“그래, 진짜 예쁘지? 근데 저렇게 겹꽃으로 피는 건 황매화가 아니고 죽단화야. 죽도화라고도 하고. 보고만 있어도 그냥 행복하지?”

“아. 그렇구나! 엄만 역시….”

나이 지긋한 엄마도, 그 손을 꼭 잡고 숲길을 걷는 딸도, 만면에 화색이 넘친다.

이 계절에 어디 죽단화뿐이랴. 매화를 전령으로 시작된 꽃잔치는 4월에 들어서며 주변 산과 갈맷길은 물론이고 삭막한 도회의 곳곳에도 형형색색의 향연을 벌였다. 5월로 접어들어선 점입가경, 계절의 여왕이란 수사가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 무렵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굳이 먼 과거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해방 이후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유독 이 계절에 비장한 사건들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70년 전의 제주 4·3사건부터 4월혁명, 1980년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국가폭력에 맞선 민초들의 처절한 저항이 모두 4, 5월에 일어났고, 그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어이없이 희생시킨 세월호 참사도 이 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이 무슨 참혹한 역사란 말인가! 길고 암울한 겨울을 이겨내고 따사롭고 찬란한 봄을 만끽하긴커녕, 저런 사건들을….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저 화사한 꽃들이 그저 피고 마는가? 천년만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가? 그렇지 않다! 저 탐스러운 동백꽃은 핏빛으로 송이째 무너져 내리듯 뚝뚝 떨어지고, 매화나 벚꽃은 그 화사함으로 우리의 찬탄을 자아내자마자 금방 푸른 잎들에 자리를 내주며 사태 져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그 빛나던 목련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처연하기조차 하다. 만산을 물들이던 개나리, 진달래는 뭐 그리 다르랴! 그저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무심히 봐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있는 듯하다. 그 아름다운 꽃들이 서럽게 진 자리에 유록색 잎이 나고 또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지 않는가!

견강부회라 해도 좋다. 우리도 그런 가슴 시린 일들을 겪으며 민주주의를 아주 조금씩 발전시켜 왔고, 국민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과 보호 정책을 더디게, 더디게 진전시켜 오지 않았던가!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진부한 경구를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을 탄압하고 짓밟은 독재자들과 그에 빌붙어 인면수심의 만행을 일삼은 부역자들에게 변명거리를 주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연과 역사의 닮음은 딱 그까지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척하는 인간이라면, 그리고 짧은 현대사 속에서 비슷한 비극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왔다면, 이제는 정말 역사에서 제대로 배워야 하고 더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우리에게 이 만큼의 민주주의를 만들어준 이들의 뼈저린 고통과 한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유사한 고난을 겪었던 적지 않은 나라가 그 비극적 역사를 곱씹으며 이미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그 ‘비극과 진보의 인과관계’가 피할 수 없이 되풀이되는 자연의 섭리처럼 보였다 해도 이젠 그런 야만적 순환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세계만방에 보여 주었다. 촛불혁명에서 드러난 성숙한 시민의식과 최근 남북 정상회담에서 발휘된 탁월한 정치력이 넉넉히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5월을 맞으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4·3사건 당시 총탄에 턱이 날아가 버려 55년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음식도 거의 씹지 못하며 무명천으로 머리를 싸매고 온갖 병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진아영 할머니의 아픔을, 광주항쟁 때 무차별 학살되어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 황량한 공동묘지에 묻혀야 했던 시민들의 원한을, 그리고 2014년 4월 갑자기 하늘나라로 수학여행을 떠나버린 수백 명의 아이를 가슴에도 묻지 못하고 그 어이없는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알리기 위해 4년을 거리에서 떠돌아야 했던 부모들의 찢어지는 가슴을….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한 음유시인 밥 딜런의 읊조림에 새삼 귀 기울여야 할 계절이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더는 아프지 않은 따사로운 봄을 위하여.

정치개혁 부산행동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