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매 집 앞으로 동해남부선 기차가 지나는 철길이 있었다. 방학이 되면 부산에서 엄마와 함께 타고 할매 집에서 지내다가 개학이 될 무렵 다시 타고 가는 기찻길이다. 밥 먹는 시간 이쯤 저쯤이거나 라디오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 기차는 지나갔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리면 여린 허벅지 살이 밀리는 줄도 모르고 마루에서 미끄러져 내려 대문 밖으로 급히 뛰어나가 기차가 오는 걸 기다린다. 기다렸던 기차가 화물차일 때도 있다. 그러면 급 서운해져서 시무룩해지지만 그래도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서 있으면 때론 마지막 칸에 타고 있던 차장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혼자거나 혹은 동생과 함께 서서 기차가 우리 앞을 지나 뒤꽁무니가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지면 뭔가 큰일을 해냈다는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2000년대 초반 철도에 관한 공연을 준비하면서 수송, 역무, 보선 등 철도의 각 구성원과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중에서 기관사들과의 인터뷰는 실제로 기관차에 탑승해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는데 아마 태백선이었던 거 같다. 그 기관사는 30년 넘게 운전을 했고 막 정년이 다 된 분이었는데 자신이 지나다니는 철길 주변의 동네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매번 같은 시간대에 지나다 보니 철길 주변의 이야기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옛날, 무곡리 524번지 앞을 지나다녔던 기관사 아저씨도 어쩌면 한 번씩은 손 흔들던 어린 꼬마아이가 눈에 들어왔을 터이다.

그 동해남부선은 이제는 복선화되어 바다와 함께 달리는 해안 철로도 없고 작은 동네 사이를 느리게 지나는 이야기도 없어졌다. 2013년 12월 1일 동해남부선의 마지막 운행 하루 전날이던가, 기차를 탔다. 마지막이란 말이 주는 여운 때문인지 청사포와 송정 구간의 그 바닷길이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 마지막이라니. 나의 정서의 한 시절이 마감되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다시 기차가 내 맘속에 들어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다. 한반도를 둘러싼 변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며 예상치를 앞지르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라면, 남북한 기찻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러면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몽골 횡단철도, 동청철도, 바이칼-아무르철도를 포함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역에 내려 바이칼호수, 몽골리안 샤머니즘의 발원지 알혼섬에 들어가 부르한 바위 아래 맑은 물속에 발도 한 번 담가보는 거다. 하얀 자작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달리다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에 해가 떨어지겠지. 긴 날을 기차에서 생활해야 하니 불편함이야 있겠지만 장대하게 펼쳐진 대륙과 자연을 보면 때로 노여움과 배신감, 불안 등에서 오는 안달복달 따위는 냉큼 물러나 앉을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만 해도 60개의 역을 지난다니, 역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과 역에서 잠깐 열리는 시장 구경만 해도 여행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다. 게다가 중국으로, 몽골로 다 연결되니 휴전선으로 막혀 있던 우리 상상력이 족쇄가 풀리는 거, 섬 아닌 섬이던 우리가 땅을 딛고 유럽까지 갈 수 있게 된다는 거, 그게 제일 큰 매력이다.

남북한 철도의 연결과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의 연결은 철의 실크로드로 불리는데 부산~서울~평양~블라디보스토크~파리~런던까지를 잇는 개념이다.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실크로드를 철도로 연결하자는 의미다. 철도를 이용하면, 해운수송에 비해 수송비와 수송시간이 약 3/5 수준까지 절감되어 물류비용이 줄어들며 남북 철도연결은 한반도 평화의 신호탄이 되어 우리 사회의 전 부문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철의 실크로드’는 부산이 출발점이다. 부산역에서 육로로 런던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의 생활영역과 사고의 지평이 넓어진다. 우리가 간다는 것은 누군가는 온다는 것.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우러지며 부산이 와글와글 살아 숨 쉰다는 거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싶다. 어쩌면 그 시간이 생각보다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아, 돈이 없다. 곗돈이라도 넣어야겠다.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