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령작가인 후배가 있다. 흔히 대필작가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일을 주로 한다. 대학 다닐 때는 필력이 좋아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론사 몇 곳을 전전하다 우연히 지인의 부탁을 받고 시작한 일이 이제는 직업이 되었다.
후배와 같은 유령작가들에게 요즘은 성수기다.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역 정가에선 2월 말과 3월 초에 후보들의 출판기념회가 쏠려 ‘2말 3초’가 대목이란 얘기도 나온다. 공직선거법은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출판기념회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어 다음 달 14일까지 가능하다. 후보들 입장에서는 홍보 효과와 함께 세 과시를 할 수 있고, 적지 않은 선거자금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앞다투어 책을 내려고 한다.
자서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유령작가는 그보다 더 많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감이 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더 많은 일을 수주하고 싶어 한다. 대개 한 권을 쓰는데 3개월 정도 걸린다.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 그래야 다른 일을 더 할 수 있고 수입이 늘어난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쁠수록 작업은 기계적으로 진행되기 마련. 급하기는 공급자나 수요자나 마찬가지여서 책은 급조되기 일쑤다.
이런 상황을 독자라고 해서 모르지 않는다. 적당히 출판기념회에 가서 얼굴도장이나 찍고 책을 (몇 권) 사 온다. 그렇다고 (대부분은) 가져온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니 엄밀히 말해 독자라고 칭하기도 힘들다. 그저 책이니 출판이니 하는 것과는 별개로 선거의 일부분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2. 70대 어르신의 자서전 쓰기를 도와드린 적이 있다.
가난한 데다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해방되고 한국전쟁 전후 한창 어수선한 때였다. 어쩌다 전국의 장터를 누비며 약을 파는 ‘방랑약장수’ 패에 끼게 되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차력도 하면서 청춘을 보냈다. 떠돌이 생활은 힘겨웠고 정착하려 해도 돈을 모으기 어려웠다. 중년에 노점상도 해보고 분식집도 해봤지만 잘 안 됐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막노동을 하고 아내는 식당일을 하며 근근이 버티었다. 환갑이 다 되어서야 어렵사리 시골에 집을 구하고 농사를 지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살아온 역정을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눈물이 공책을 적셨다. 그렇게 길지 않지만 자서전을 완성했다. 출판기념회는 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어르신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베레모를 눌러쓰고 깔끔한 양복 차림의 멋쟁이가 되었다.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에 점퍼 차림이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도 훨씬 밝아져 흡사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사이가 좋지 못하고 서먹하던 아들이 자서전을 본 후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슬그머니 용돈을 내밀었다. 딸도 말없이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 지금부터라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싶었다. 자식들과 손자, 이웃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진 것이었다.
3. 지난주부터 도서관에서 자서전 쓰기 강좌를 시작했다. 수강생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한 번뿐인 여행, 나의 인생 자서전 쓰기’란 강좌명이다. 늘 그랬듯이 실제로 자서전을 쓰라고 하면 대부분은 어려워한다. 학력 수준이 높건 낮건, 30대건 70대건, 남자건 여자건 비슷하다. 사회적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닌 ‘별 의미 없는 삶인데 남겨서 뭐하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의미 없다고 느끼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 역사는 개인을 잊어도 문학은 나약한 인간의 삶을 기억한다. 선생은 대표작 대하소설 ‘지리산’을 쓰는데 “이태의 수기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록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의미심장하다.
정치인이든 평범한 생활인이든 자신을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추억도 좋고 공치사도 좋다. 그래야 오래 기억될 수 있다. 다만, 허깨비(유령)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기록하기를 바랄 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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