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는 ‘9988234’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는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4일째 눈을 감는다’라는 뜻으로 건강하게 오래 살다 편안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을 ‘9988’이라고 표현한다. 기업 수로 99%를 차지하고 고용의 88%를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위상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산업에서 중소기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소기업의 부가가치 생산성은 대기업의 1/3 정도에 불과하며 근로자 임금도 대기업의 55%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전체 숫자는 350만 개에 이른다.

그중에 10인 이상의 제조 중기업은 10만 개에 불과하고 9인 이하의 소기업이 38만 개, 나머지는 5인 이하의 소공인과 소상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소상공인은 650만 명에 이르는데 임금 격차의 주요 원인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에서 생겨나며 이들 영세 중소기업은 경제와 산업의 환경 변화에 민감하며 작은 환경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도산과 폐업을 반복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열악하다. 지금 주축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기계산업의 장기 불황으로 부산의 경제성장률은 2.5%로 전국 평균 3.2%에 비해 현저히 낮으며 체감 경기는 최악을 넘어 한계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조선 산업은 지난 몇 해 동안의 장기 침체로 인해 국내 중·소형 조선소의 몰락과 대형조선소의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직장을 떠나고 있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리소문 없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회사 문을 닫고 직원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영세 중소 협력사들의 눈물을 우리는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조선산업은 종합 조립산업으로 선박 건조에는 25만 개가 넘는 기자재가 사용된다. 또한 제작 공정별 특성으로 많은 숙련 작업자가 필요하며 각각의 기자재는 대형조선소에서 제작할 수 없어 협력사들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

조선산업의 생태구조를 보면 글로벌 대기업의 대형조선소들이 최전방에 포진하고 이들에게 직접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1차 협력사가 있으며 1차 협력사에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2차, 3차 협력사들이 포진한다. 2차, 3차 협력사들이 조선산업의 뿌리산업으로 그 역할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구조에서 최전방의 대기업과 산업관계가 멀어질수록 기업들이 영세하고 성장성과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상위의 기업들보다 기술 난이도가 낮고 시장 진입 장벽이 높지 않아 초기에는 적은 투자금과 인력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제품군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산업이 호황기에는 이들 2차, 3차 협력사도 노력 여하에 따라 일정 수준의 경제적 성과를 올리며 성장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황기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것은 2차, 3차 협력사들이다. 이들은 불황을 이겨낼 수 있는 기술, 자금, 인력, 인프라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 2차, 3차 협력사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어 조선 산업의 불황속에서도 1차 협력사들이 자재 수급에 비상이 걸려 있다. 2차, 3차 협력사들의 몰락은 곧 1차 협력사들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머지않아 우리 조선산업을 대표하는 대형조선소에게도 큰 위협으로 다가 올 것이다.

지금 조선산업은 위기 극복을 위해 선박 수주에 전 역량을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뿌리가 되는 2차, 3차 협력사들이 무너진 조선 산업의 생태계 붕괴로 인해 기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수주한 선박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생겨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경제 전반에 걸친 문제이다. 비록 힘없고 나약하지만 중소기업들이 우리 경제의 뿌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에 우리 경제는 지금의 성장을 이룩해 왔고 이들 중소기업이 살아나야 우리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소득주도 성장과 중소기업 주도 성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중소기업들은 불황 속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전환 등 급격한 노동환경의 변화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기업 수로 99%를 차지하고 고용의 88%를 담당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경제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하며 99년 이상 88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과 함께 중·장기적인 중소기업 활성화 정책의 도입과 부양책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선보공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