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전 뮌헨올림픽 마라톤에서 ‘쇼킹’한 일이 벌어졌다. 처음 출전한 미국의 무명 선수 프랭크 쇼터가 1위로 결승선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런 마라토너가 나갔는지조차 몰랐다. 대회 전 그의 우승을 예상한 관계자도 없었다. 경기 후 쇼터는 이렇게 털어놨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뛰었다. 몇 등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고, 미국의 명예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들을 배제하고 뛴 것이 금메달의 요인이 됐다는 걸 말해준다. 이렇듯 스포츠의 핵심요소 중 하나가 멘털(정신)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지닌 선수라도 멘털이 약하고 평정심을 잃으면 고비에서 무너지기 쉽다. 선수들이 평소 멘털 트레이닝에 중점을 두는 이유다. ‘돌부처’ ‘포커페이스’로 이름난 여자골프 박인비가 해외 투어 중에도 국내 멘털전문가와 전화 상담을 하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 테니스사를 새로 쓴 정현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멘털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밝혔다. 심리학 전공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정현이 이번 호주오픈에서 조코비치 등 거물 선수들을 연파하자 외신은 그에게 아이스맨(iceman)이란 닉네임을 붙여줬다.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정현은 준결승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무려 5차례의 ‘타이 브레이크’를 모두 이겼다. 큰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을 발하는 ‘강철멘털’인 셈이다.

그가 이룬 ‘한국인 최초의 그랜드슬램대회 4강 진출’보다 국민들이 더 감동한 건, 정현의 발바닥 사진이 보여준 초인적인 정신력이다. 물집이 터지고 속살까지 훤히 드러난 그의 발바닥은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도 진통제를 맞고 내색 없이 경기에 나섰다. 20년 전 외환위기 때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연못 맨발 샷’으로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줬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정현은 부산오픈과도 인연이 깊다. 열일곱 살 때인 2013년부터 이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2015년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고, 극심한 슬럼프로 1회전 탈락이란 쓴맛도 봤다. ‘테니스 전설’ 이형택이 말했던 것처럼 정현에게도 부산오픈이 정신적 육체적 성장의 자양분이 됐을 듯하다. 지난해에는 부상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올해 5월 부산오픈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