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오페라가 있다. 바로 어둠 속의 오페라로 불리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장벽을 제거한) 공연이다. 극장에서 라디오를 통해 공연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오페라이다. 이는 예술을 사랑하는 부산의 한 중견 아나운서의 고민에서 탄생했다. “아름다운 오페라를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도 즐기게 할 수 없을까?”, 참신하고 멋진 발상이다. 이후 UN의 초청으로 미국에서도 수차례 공연하고, 미국 뉴욕페스티벌 등 국내외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하니 대단한 일이다.
배리어 프리 오페라는 무대장치보다는 음향효과와 해설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가 눈을 통해 보는 장면은 또 하나의 장벽일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 무한상상을 통해 훨씬 더 풍부한 장면을 그려낼 수 있지만, 눈은 현실만을 보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필자가 몸담고 있는 기술보증기금에서 송년음악회로 배리어 프리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초청 공연했다. 부산지역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을 초청하여 오페라를 함께 즐기면서 배려와 나눔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기보 직원들과는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자는 의미도 담아보았다.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하는 기보 업무에서도 장벽을 과감히 제거하고 창의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해보자는 ‘배리어 프리 경영’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지난해 5월 발표한 중소기업 옴부즈만 활동 백서에 따르면 창업할 때 들어가는 규제 비용이 2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규제비용은 사업을 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자본금과 인력 고용, 시설·장비 구매 등에 드는 비용을 뜻한다. 이는 젊은 창업가들에게는 넘기 어려운 크나큰 장벽이 아닐 수 없다. 또 백서는 창업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새로운 분야와 관련된 규정 정비가 늦다는 점을 들었다. 이 때문에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지체되고 창업 기회까지 박탈된다고 하니 보이지 않는 장벽은 곳곳에 존재한다. 장애인을 위해 시작되었던 배리어 프리가 이제는 창업과 신산업 육성에도 필요하다.
최근 정부는 주력산업을 고도화하고 신산업을 발굴한다는 새 정부의 산업정책 밑그림을 내놓았다.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에너지, 바이오, 반도체 등 5대 신산업 프로젝트를 우선 추진하고 2022년까지 30만 개의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 또한 빅데이터와 스마트시티, 핀테크, 드론, 자율 주행차 등 신산업분야에 대해서는 마음껏 실험을 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초기인 지금이 불합리한 규제들을 스스로 찾아내 없애고 젊은이들이 맘껏 창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골든타임이다.
기보도 창업기업을 지원하는 공기업으로서 각종 규제의 매너리즘에 빠져들지는 않았는지 나름대로 돌아보았다. 젊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한 토크콘서트와 브라운백 미팅을 실시하였고, 자유롭게 혁신활동을 추진하는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등 내부의 장벽을 깨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4차 산업혁명 관련 전문인력들의 창업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대학과 연구소의 기술 인력이 마음놓고 창업할 수 있도록 연대보증인이란 장애물을 없앴고, 초기 지원금액도 30억 원까지 자유롭게 쓰도록 하였다. 올해는 관련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를 병행해서 대표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낼 계획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금융중심지와 관련된 정책 토론회가 있었다. 부산국제금융센터(BIFC)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핀테크를 활용하여 레그테크(RegTech) 산업을 육성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레그테크는 규제를 뜻하는 레귤레이션(Regulation)과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합성어이다. 다른 어느 산업보다 금융에는 다양한 규제가 있고 이를 사전에 체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비용이 엄청나다. 이를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각종 규제를 원활히 이행하는 데 활용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인 규제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산업을 부산 금융중심지에서 꽃 피우자는 이야기는 참으로 신선했다. 규제가 많은 금융산업에서 핀테크 등 신기술을 활용해서 규제 장벽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인 4차 산업혁명 전략이 아니겠는가.
올해는 기보가 1989년 부산에 본점을 두고 설립된 지 어느덧 30살이 되는 해이다. 기보가 지금까지 금융정책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다면 이제는 중소벤처기업의 성장판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동안 기금관리형 기관으로 기술평가와 신용보증에 충실해 왔었으나 이제는 기존 업무 영역의 장벽을 넘어서 벤처기업의 수호천사로서, 투자와 컨설팅을 포함한 종합지원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갖는 ‘배리어 프리 기보’를 희망한다.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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