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를 막 마쳤을 무렵인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런 까닭에 말년 병장 때는 이따금 복무기간이 한참 남은 후임들에게 객쩍은 소리를 하곤 했다. “야, 나는 제대한 뒤 집에서 발 뻗고 누워 올림픽을 본다. 너희들 참 안됐다.” 선임 앞이니 차마 표현을 하지 못했겠지만 그 후임들의 속이 얼마나 심하게 뒤집혀졌을까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말과는 달리 정작 서울올림픽을 즐겼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는 지금도 흥얼거릴 수 있고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로지르던 ‘굴렁쇠 소년’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아마 군복을 벗었답시고 친구들과 이리저리 싸돌아 다니느라 그러했을 법하다. 아니면 당시 정통성이 결여됐던 군사정권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기획한 것이 서울올림픽 아니냐는 또래 세대들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조했던 이유가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우리나라 평창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 이번에는 동계올림픽이다. 개막일이 내년 2월 9일이니 50일이 채 남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생각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은 이미 확정된 국제행사인 만큼 말끔하게 치렀으면 하는 바람일 터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의 능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 반응도 좋다. 92개 나라가 출전의사를 밝혔다.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 때 88개국보다 숫자가 늘었다. 참가국이 많으면 경쟁이 더 치열하기 마련이지만 한국이 개최국 이점을 살리면 종합 4위라는 목표(금메달 8개,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 달성이 어렵지만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벌써 평창올림픽이 성황리에 막을 내릴 것이란 말도 들린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으로 스멀스멀 불안감이 새 나오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여건이 워낙 불투명해서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북한이다. 북한은 출전 신청 마감이 끝난 아직까지도 평창올림픽 참가 여부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이에 앞서 북한은 유일하게 자력으로 따낸 피겨 페어 종목 출전권까지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평창으로 오는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북한이 참가 의사를 밝힌다면 IOC가 국제빙상경기연맹(ISU)과 논의를 거쳐 와일드 카드를 줄 수 있다.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가 걸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더 큰 걱정은 북한이 이런 제안마저 거부할 때다. 이 경우 예상 가능한 북한의 움직임은 침묵이든지 아니면 무력 도발이다. 만약 올림픽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북한이 ‘잔칫집에 재 뿌린다’는 심보로 미사일 실험이라도 하게 되면 파장은 손 쓰기 힘들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유엔이 지난 11월 총회에서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누구도 군사행동을 하지 말자는 휴전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나 그간 북한 행태로 볼 때 지켜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측의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는 것도 맘에 걸린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재로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미국 측에 제안한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연합훈련 연기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북한에 도발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이를 계기로 북한의 대회 참가를 유도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화를 재개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다.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올림픽 정신이 뒷전으로 밀려난 지는 이미 오래다. 반쪽 행사로 치러진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보듯 이제 올림픽 성공 여부는 국제역학 관계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이번 평창올림픽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북한 리스크’를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요소로 여겨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당시 서울올림픽은 대회 유치 의도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대회임이 분명했다. 반면 따지고 보면 이 대회가 결과적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큰 몫을 한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양측은 서울올림픽에 단일팀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체육회담을 대회 직전까지 수십 차례 개최했다. 이런 우호관계는 1990년대 이후에도 이어졌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물론 역대 어느 정권보다 더 호전적이며 예측이 불가능한 김정은 체제의 북한에게서 이런 과거가 재현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전쟁은 없어야 하며, 평창올림픽이 현재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마지막까지 힘을 실어줘야 할 이유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