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퉁이극장에 전주의 영화상영단 무명씨네가 찾아왔다. 진주에서는 진주같은영화제 시민사무국 분들이 다녀갔고 울산에서는 야외상영회와 웰다잉영화제를 직접 만든 분들이 다녀갔다. 이처럼 시민들 스스로 영화를 프로그램하고 상영하려는 움직임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알찬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그 이름은 이음영화제다. 작년 첫해는 ‘잊음 영화제 이음’이었는데 올해는 더 간결하게 이름이 바뀌었다. 사회적 편견이나 무관심으로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던 시민 주도 영화제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이 ‘이음 영화제’의 취지다.
지난 7월 즈음부터 이음영화제를 기획하는 라운드테이블 회의가 시작되었다. 참여단체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모퉁이극장 실험영화상영회, 서구한빛장애인자립생활센터, 부산성소수자인권모임 QIP로 네 단체의 시민들이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나는 국도예술관의 정진아 프로그래머와 함께 멘토링 파트너로 참여했다.
시간을 맞춰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회의는 반드시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날에 진행되었다. 저마다 다른 지향과 목표를 가진 단체들이었지만 수차례 만나고 어울리며 어느덧 마주 앉으면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연대를 바탕으로 함께 영화제를 준비한 과정이 빛났다.
그 시간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각 단체의 의견을 경청하며 소통하는 과정에서 보인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었다. 멘토링 역할로 참여했지만 나는 오히려 참여 단체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이들이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큰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평등한 세상이 앞당겨질 것이다.
이음영화제의 보람은 시민들 스스로 영화제를 기획하고 개최하는 과정을 경험케 함으로써 시민영화기획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역할을 온전히 해낸 점이다. 모퉁이극장도 시민 영화프로그램들이 있지만 여러 자원의 부족으로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음영화제에 참여하면서 그 한을 푼 듯하다. 영화제 주최기관인 부산문화재단의 사전준비와 운영지원 속에서 5개월 동안 6차례의 단체 간 연대회의가 밀도 있게 이루어졌고 그사이에도 각 단체는 영화제 개최를 위한 단계별 순서를 밟아갔다. 그렇게 준비과정이 서서히 익어갔기에 탄탄하게 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좋은 시민영화프로그램의 선례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음영화제의 성과에 덧붙여 보완점들을 생각해본다. 우선 앞으로 점점 확대될 시민 영화프로그램 시대를 대비해 시민영화프로그래머를 육성하는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이 갖추어지면 좋겠다. 연구를 통해 짜임새 있는 강의안과 가이드북이 마련된다면 많은 시민이 기회를 가질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관객개발의 문제이다.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모임들과 연계하여 시민주도 영화 프로그램의 가치와 의의를 전파하고 이를 통해 프로그램을 향유하는 항시적인 관객층이 두꺼워진다면 나만의 컴필레이션 음악을 만들듯 누구나 각자의 감성으로 영화를 프로그램하는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지금 시민 영화프로그램이 왜 활발하게 생겨나고 있는지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처럼 영화는 그만큼 공감의 힘이 크다. 저마다의 이슈와 활동영역, 과제를 안은 시민단체들은 중요한 소통 매체로 영화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영화를 더 잘 활용하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도 스스로 영화를 기획하고 영화제를 개최하려는 시민과 단체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장벽은 높다. 정식영화제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선 영화의 수급, 저작권문제, 극장대관 등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음영화제는 시민들이 직접 영화제를 만들 때의 고충을 해소해준 꿈의 프로젝트였다.
한쪽에선 시민들이 역량을 마음껏 펼칠 프로그램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멋지게 운용할 근면한 관객들이 필요하다.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 지속된다면 시민사회를 넘어 영화계에도 큰 활력을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해지려면 영화진흥위원회나 영상위원회 같은 기관들이 적절한 정책과 지원사업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모퉁이극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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