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는 핑계로 세상 돌아가는 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10대들 사이에서 대세라 불린다는 ‘급식체(給食體)’의 존재를 요즘에야 알게 됐으니 말이다. 나름 머리를 굴려 학교 급식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을 했다. 정확한 뜻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은어’란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셈이 됐다.
방송에서도 이 단어가 심심찮게 들리길래 구체적인 용례를 찾아봤더니 참으로 요령부득이다. 예컨대 “오졌고 지렸고 개쩌는거 인정하는 부분이고요” “빼박캔트”라는 식이다. 전자는 너무 대단해서 확실하게 인정을 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빼도 박도 못 한다는 말을 줄인 것으로 절대 취소할 수 없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당연히 급식체에는 “우리 말을 파괴한다”라는 부정적인 지적이 따라 다닌다. 반면 SNS의 발전이 가져온 언어 환경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반박논리도 존재한다. 깊이 생각해보면 급식체 만연은 분명 바람직한 게 아니다. 하지만 어느 연령대건 10대 때 어른들이 모르는 은어를 써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테니 급식체는 지나가는 유행일 뿐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급식체처럼 애교나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없는 막말도 수없이 범람한다. 이런 말들은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파고 인격을 심하게 훼손한다. 특히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정치권 인사들의 입에서 얼토당토않은 발언이 나올라치면 도대체 저 양반들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럴까라는 우려가 먼저 앞선다.
최근 두어 주 사이에도 정치권에서는 다듬어지지 않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유한국당 류여해 의원은 포항 지진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경고이며 천심이고 천벌”이라는 발언을 해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당 홍준표 대표는 과거 자신이 국회 운영위원장을 할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이던 원혜영 의원에게 국회 특수활동비를 줬다고 발언했다가 당사자가 반발하자 “기억의 착오”라고 말을 거둬들이는 촌극을 빚었다.
정의당 김종대 의원도 설화(舌禍)를 입었다. 그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 병사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다 결과적으로 이국종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을 비난한 형국이 돼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김 의원이 속한 정의당은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항의 전화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역시 막말 홍역을 치렀다. 안 대표는 지난 23일 원외지구당 위원장들과의 간담회 도중 한 여성 위원장과 말다툼을 하다 “싸가지 없다”는 발언을 해 구설에 올랐다. 안 대표가 이후 당사자에게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여성 위원장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바른정당과 통합문제 등으로 그러잖아도 어수선한 당으로서는 뜻밖의 악재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정치인들이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다. 이후에 거센 역풍을 맞더라도 일단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고 보자는 생각이거나 불리한 정국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다. “품격있게 예의를 차려 말하면 언론 등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막말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더라”라는 한 정치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의 결속과 조직적 저항을 위해 의도적으로 총대를 메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며 앞장섰던 여당 전 대표가 좋은 사례다. 홍 대표의 국회 특수활동비 발언은 검찰이 자당 소속 의원들을 잇따라 수사 대상에 올리자 이에 대한 물타기로 비쳐진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조금 황당하기는 하나 정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당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목표한 바가 무엇이든 정치인들의 정제되지 않는 언사는 사회에 득이 되기보다는 실이 될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가 내뱉은 발언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들이 더해지다 보면 종국에는 논쟁의 초점이 모호해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논란의 당사자는 슬그머니 대열에서 이탈하고 문제의 발언은 실체없는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유권자들의 정치 혐오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말로 먹고 산다’는 정치인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면 그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해서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존재한다는 게 상식이다. 더구나 정치판은 10대들의 재치와 감성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급식체가 통하는 공간이 아니다. 진중해야 할 정치인들의 말이 급식체처럼 가볍게 받아들여진다면 이같이 남우세스러운 일도 없다.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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