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일본의 금융은 변화를 모색해 왔다. 금융위기가 한국 등 아시아를 휩쓸던 1990년대 말, 일본은 신기술에 따른 고객 니즈의 변화로 금융업의 효율화가 절박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과 자동현금인출기(ATM),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고객들이 은행 창구를 찾지 않고도 금융업무를 보는 데 문제가 없지만, 은행은 많은 지점을 끌어 앉은 채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차례 의견수렴을 거쳐 2000년, 일본 정부는 과감한 금융 규제 완화 방안을 내놓았다. 규제 완화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다른 업종의 은행업 진출을 개방하고 ‘은행대리점’을 폭넓게 허용하는 것이었다. 은산(銀産)분리의 벽은 깨졌고 은행 업무의 일부를 다른 기업이나 개인에게 위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은행들이 속속 생겨났다. 첫 번째 인터넷 전문은행으로 ‘재팬네트은행’이 2000년 출범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통신사인 NTT, 전자회사인 후지쓰 등이 출자했으며 나중에 인터넷 포털사인 야후가 대주주로 합류했다. 이로써 인터넷, 휴대전화를 통한 예금, 송금, 인터넷 쇼핑결제 등이 더욱 간편해졌다. 이어 2001년에는 전자회사인 소니가 ‘소니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산하 보험사를 바탕으로 개인 자산 관리를 영업 목표로 삼았다. 외화 예금, 투자신탁, 펀드상품에서 주택대출까지 취급하면서도 인터넷과 소니생명보험의 대리점과 보험사들을 은행대리점으로 지정하여 수수료를 낮출 수 있었다.
유통업체들도 은행업에 뛰어들었다. 2001년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슈퍼체인 이토요카도를 운영하는 세븐그룹이 만든 ‘세븐은행’은 전국 편의점에 현금지급기를 설치하여 연중무휴 24시간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한편 슈퍼마켓·대형 쇼핑몰을 운영하는 이온그룹이 세운 ‘이온은행’은 쇼핑센터마다 유인 점포를 마련하여, 일반 은행처럼 예금 투자신탁 가계대출 주택대출 보험 펀드상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부들이 쇼핑과 동시에 자산 운용을 포함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영업시간을 쇼핑센터와 같이 주말에도 밤 9시까지 열고 있다.
2001년, 전자상거래업체인 라쿠텐도 ‘라쿠텐은행’을 세웠다. 인터넷쇼핑몰의 소액 전자결제를 핵심 업무로 출발했던 이 은행은 점차 펀드상품 판매 외환 외화예금 등 사업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동통신사인 KDDI는 미쓰비시도쿄UFJ은행과 휴대전화를 기반으로 ‘지분은행’을 설립했다. 자기 휴대전화번호를 통장번호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 이름을 자기 자신이란 뜻의 지분(自分)으로 지었다. 휴대전화번호만으로 송금 등 모바일뱅킹이 가능하며 전자 화폐도 충전해 사용할 수 있다.
한편 증권사가 관련된 은행으로는 ‘수미신SBI네트은행’과 ‘다이와넥스트은행’이 있다. 2007년 소프트뱅크 투자 관련 금융그룹 SBI그룹과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이 만든 ‘수미신SBI네트은행’은 SBI 증권과 연계하여 영업하고 있다. 또 증권사인 다이와증권그룹이 세운 ‘다이와넥스트은행’도 있다. 이 은행들은 예금 계좌와 증권 계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주식거래 고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인 도쿄도가 세운 ‘신은행도쿄’도 있다. 도쿄도가 몇몇 민간기업의 출자를 받아 2005년 발족한 이 은행은 도내 중소기업·소상공인에게 무담보 대출 등의 정책지원 사업에 특화하고 있다.
일본은 산업자본의 은행 참여를 일률 규제하는 은산분리 정책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았다. 대신, 당국이 은행의 건전성, 시장 독점의 관점에서 주요주주를 국제기준에 의해 감독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지금, 일본은 핀테크 촉진을 위한 새로운 법 검토에 들어갔다. 이제까지 송금, 결제는 은행이 독점한 반면, 은행법은 전자상거래와 전자결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통신업체가 송금·결제하는 것도, 은행이 전자상거래를 하는 것도 허용하여 핀테크의 어떤 걸림돌도 없애겠다는 구상이다.
우리나라는 올해 첫 인터넷 전문은행인 K뱅크와 카카오뱅크가 출범했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지분 한도를 늘리는 은산분리 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반쪽에 머물고 있다. 일본 금융이 십수 년전부터 변해왔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바꾸지 못하는지, 핀테크는 언제 따라갈 것인지, 조바심이 든다.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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