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관계에 통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모두 어디론가 떠나는 그때 나는 떠나지 못했다. 대신 시골집에서 손님을 맞았다. 구순을 맞은 시어른을 뵙겠다며 조카들이 왔기 때문이다. 모인 사람은 모두 스무 명, 3박4일 일정이었다.

좁은 공간이야 추울 때가 아니니 어떻게 한다고 해도 스무 명이 끼니마다 뭘 먹을 것인지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피할 수도 없고 줄어들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추석에는 가족들이 먹을 걸 준비해야 하니 두어 끼는 나가서 먹고 나머지는 하는 김에 조금씩만 더하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내가 그 비상사태를 감당할 생각을 한 것은, 멀리 살아 자주 만나지 못한 조카들과 그 자녀들을 보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가끔 만나도 어제 만난 듯 다정하고 반갑게 대하는, 이제는 장성한 조카들과 그 자녀들을 만나는 일은 3박이라는 부담이 있긴 했지만 반가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가슴 벅찬 일이었다. 장수시대이긴 하지만, 90년 전에 태어난 한 사내애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장성하여 가정을 이뤄 5남매를 두고, 그 5남매가 자라 또 가정을 이루면서 4대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는 것. 더구나 부부가 함께 살아 4대가 한집에 모이는 일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으니 어른들의 감개는 오죽했을까. 통고가 온 그날부터 만남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겪을 노고를 염려하시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힘들어서 어떡하느냐는 염려에 깃든 진심을 위로 삼아 나는 준비에 돌입했다. 추석 연휴에는 영업하지 않는다는 식당 두 군데를 겨우 예약해놓고, 스무 명의 먹거리를 준비하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내 소중한 시간이 소모 당하는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잠시, 마침내 연휴가 되어 조카들이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앞세우고 들어서는데 무척 반가웠다. 먼 길을 달려온 조카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은 널찍한 마당을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윽고 좁은 거실에 들어선 조카들이 자녀들과 함께 조부모님께 절을 하기 위해 나란히 섰다. 1대에서 4대까지 다 모인 셈이었다. 한 가문의 1대인 노부부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란히 앉아 있고, 나를 비롯한 2대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아이들과 함께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모여 3박4일간 어지간히 웃고, 떠들었다. 예전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설사 내가 백세를 누린다고 해도 다시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집안에 잔치만 있다 하면 시골 친척들이 다 와서 며칠씩 머무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귀찮은 기색 없이 그 뒷바라지를 다 했고, 친척들은 흡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 만남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도 예사로운 시대이니 그런 번잡한 모임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가 좋으면 희생도 보람이 되는 듯했다. 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심리적 온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내가 연휴 동안 기꺼이 내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좀 수고롭더라도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어째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들은 내게 언제나 완벽한 우군이었다. 늘 격려와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준비과정은 힘들어도 보람이 있었다.

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좋으면 힘든 일도 감수할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벗어나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체온이 식으면 생명이 위험하듯 온기가 사라진 사회는 위험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위로의 말 대신 냉소와 비난과 음해가 난무하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병들게 한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금 그 위험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조작된 거짓말이 조직적으로 횡행하고, 사회구성원 간의 언어는 갈수록 저열해지고, 행동은 난폭하다 못해 잔인해지고 있다. 넘쳐나는 잔혹한 뉴스 속에서 마음도 냉담해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지경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 곁의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아낌없는 격려의 눈길을 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굳어가는 우리 마음에 온기가 흐르고, 그 온기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이겨낼 힘을 주지 않을까.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