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과거정권 적폐수사를 놓고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보수·진보진영 간의 공방이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다. 얼마나 ‘기술적’으로 접근할 것인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장은 ‘적폐’에 대해 “국정 농단의 원인이 된 행위와 그 행위를 만든 제도라든지 문화 시스템이고, 이런 것들을 규명하고 개선하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규정했다. 쉽게 말하면 기존의 모든 것이 적폐 대상이라는 말이다.

당장 적폐청산의 타깃이 된 이명박 전 대통령 측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 증거·증언도 있다”(이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면서 ‘노무현 정부 시절 적폐’로 맞불을 놓고 나섰다. 이 전 대통령 임기 초반 노무현을 수사할 때 9년 후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자유한국당은 적폐청산 TF 구성 지시를 이유로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과 백원우 민정비서관을 직권 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말그대로 ‘내로남불’에 대한민국이 멍들어가고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도 고쳐매지 마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정권이 바뀌는 5년마다 적폐청산을 반복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디로 흘러갈까. ‘정치적 결단’으로 적폐청산을 정리할 수는 없을까. 타이밍도 그렇다. 집권 초반에 하지 않으면 언제 하느냐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국내외 정세가 과연 그렇게 한가한가.

한반도 주변에는 전에 없던 ‘스트롱 맨’들이 판을 치고 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8일 개막한 제19차 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사상’을 당장(黨章)에 올림으로써 마오쩌뚱 반열에 올라섰다. 1인 독주 체제라는 절대권력을 획득한 그는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공언했다. 사드문제로 악화된 한중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일본 아베 총리 역시 총선에서 압승,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변신하는 연립여당 개헌발의선을 확보했다. 북핵 위기에 따른 안보공조를 빌미로 독도 영유권 주장, 과거사 부인 교과서 채택 확대, 소녀상 철거 등에 대한 압박강도를 높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내달 초로 예정된 첫 아시아 방문을 앞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잦은 돌출발언으로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들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동맹국을 압박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우리나라의 대북제재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등 노골적으로 북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여기에다 북한의 김정은도 잇따른 무력시위와 막말로 스트롱 맨 대열에 합류하려 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연일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청년실업, 가계부채 폭탄, 영세 자영업자들의 절규 등 당면한 국내 현안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만큼 정부와 정치권이 정신을 차려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권은 전직 대통령은 물론이고 전전(前前) 대통령에 이어 급기야 전전전 대통령까지 끌어들이면서 과거싸움에 함몰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대한민국이 자꾸 뒤만 돌아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19대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네편’ ‘내편’없이 모든 국민들이 열광하고 환영했다. 문 대통령을 반대했던 사람들조차도 ‘감동의 도가니’로 끌어들였다. 지금의 적폐청산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데, 혹시 적폐청산을 정치적 계산으로 몰아가려는 측근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밝혔던 포용·화해를 바탕으로 한 도약의 기회는 아직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 자신감이다. 문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70%를 육박,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자신감 있게 정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탄탄하다. 이 정도 기반을 바탕으로 가진 것을 좀 버려 화합을 도모한다면 역사에 남는 더 큰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선택은 문 대통령과 측근들의 몫이다.

서울본부장·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