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몹시도 길었다. 그리고 잔인했다. 열대야는 잔혹했고 폭서경보가 휴대전화를 수시로 달궜다. 그렇지만 계절은 속임수 없이 시간의 바람을 타고 지난가을을 불러들였다. 먼 산으로부터 단풍이 서서히 물들며 아름다운 가을이 눈앞에 소리 없이 나타나고 있다. 가로수는 노랑 빨강 갈 빛으로 물들고, 산마다 울긋불긋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가을의 빛을 머금고 미소 짓고 있다.

이 시기만 되면 나는 괜스레 나무만 보아도 마음이 풍족해지고 기분이 들뜬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만 나면 산으로 들판으로 마구 쏘다니고 싶어진다. 이유도 조건도 없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울긋불긋 화려한 치장을 한 나뭇잎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굳이 단풍이 아름답게 든다는 먼 산에 들 필요가 없고, 복작복작 미어터지는 명산을 읊어대며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다니며 ‘햐! 기막힌 단풍이군!’ 탄성을 질러 대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가까운 산, 가로수, 뜰 앞에 나무들이 제각각 빚어낸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깔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버스에 앉아 차창에 시선을 던지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갈 빛으로 반짝이는 느티나무 가로수나 샛노랗게 물든 은행 나뭇잎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아름다운 색깔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기분으로 버스에 올라타 차창을 스치며 날리는 잘 익은 빛깔의 가랑잎을 만나보고도 싶고. 얼마 남지 않은 자리라도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내 색깔은 이런 것이요, 얼마나 아름답소’ 하고 의연한 자세로 잘 물들었다는 단풍 숲이 조각조각 어우러진 산이 부럽지 않고, 공원이 그립지 않다는 가로수들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재미를 만끽하고도 싶고. 황량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보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가랑잎이 바람에 잠깐씩 흩날리는 모습도 보고 싶고. 단풍의 계절 가을은 그렇게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다.

단풍이 철철 넘쳐흐르는 멋진 산에 드느라 먼 길 마다치 않고 달려가는 기분은 아니지만 언제나 내 주위에서 오가며 볼 수 있고, 또 잠시 잠깐 명상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언제나 그리 화려한 빛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멋진 가로수 잎사귀들이기에 어디서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햇살보다 노랗다고 시위하는 은행나무, 은은한 갈 빛으로 물드는 느티나무, 바랜 검붉은 빛으로 큼직한 이파리를 날리는 플라타너스와 벚나무들. 몇 안 되는 종류의 가로수들을 눈여겨보면서도 충분히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차창 너머 가로수를 본다는 것으로 하여도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즐거운지.

이따금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면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다. 길가에 가랑잎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아예 나무둥치를 해머로 치거나 장대로 가지를 후려치는 모습들, 가랑잎을 한꺼번에 해치울 태세다. 건물이나 가게 앞에 떨어지는 낙엽을 매일 치우는 것이 귀찮고 힘겨워서 일 거다. 때로는 가로수 상수리 가지를 향해 빗자루를 던져 가랑잎을 떨구는 모습에서 성질 급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괜스레 그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냥 가만히 둔다면 행인들에게나 낙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운치 있는 재미를 줄 거라고. 아마도 그런 말을 한다면 낭만은 개뿔 되레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 길이 늘어나는 시간이 다가온다. 낙엽이 쌓일 새도 없이 거리는 환경미화원들의 수고로 깨끗하게 치워질 것이고 또 그것이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임무라 여기며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조금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낙엽이 조금씩 쌓이고 밟히는 아삭거리는 소리에 누군가에게는 시심(詩心)이 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템포 늦춰 낙엽을 치워도 뭐라 할 사람들 없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한꺼번에 치운다고 번거롭다고 나무를 때리고 쳐서 가지를 부러뜨리고 나무에 상처를 주는 일도 하지 않았으면 싶다. 당장이야 번거로운 일들을 피했다고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잎사귀 없이 휑하니 빈 가을의 나뭇가지는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할 것인가.

마지막 잎사귀를 바라보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조금은 더 기다릴 줄도 알 일이다. 가랑잎이 바람 따라 휘날리는 계절이 몹시도 그리웠던 이 여름 언제나 시간은 말없이 아름다운 가을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다. 아니 가을이 먼저 와 우리를 아름다운 단풍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그러기에 단풍은 서서히 올 것이고 그에 따라 단풍잎들도 거리를 휘날리는 낙엽들도 천천히 치워도 될 것이다. 그 정도의 여유는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시심을 자극하는 일이 아니라도.

국립경남과학기술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