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곳곳에 수로(水路)가 흐른다. 그 위로 크고 작은 배가 떠다닌다. 도심지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하고 웅장한 궁전과 성당이 눈길을 끈다. 발레 연극 음악 등 각종 공연이 펼쳐지는 도시에는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기고, 거리엔 낭만과 운치가 넘친다. 10년 전에 갔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이다.

러시아 제2도시이자 최대 무역항인 이곳은 물과 다리의 도시다. 교량 수가 중심부에만 360여 개에 이른다. 외곽지역까지 합치면 600개가 넘는다. 다리 상판이 위로 들리는 도개교는 20개나 된다. 늪지대였던 네바강 하구 일대의 100여개 섬을 연결해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북방의 베니스’란 별칭이 붙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러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이 도시를 특징짓는 또 다른 키워드는 박물관. 시내 박물관 수가 50개를 웃돈다.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도 그중 하나다. 빵 박물관에서부터 무기, 동물학, 음악, 정치역사 등의 박물관까지 웬만한 박물관은 다 있다. 그야말로 박물관의 박물관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적지답게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역사유적지처럼 느껴진다.

과거 200년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1917년 볼셰비키혁명의 진원지로,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최초 해외 상주 공관이 이곳에 설치됐다. 그 공관이 있었던 시내 페스첼라 5번지의 6층 건물 외벽에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아관파천’의 주역으로 러시아 초대 공사였던 이범진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이곳에서 자결했다. 부산시와는 2008년에 자매도시 관계를 맺었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열차의 시·종점인 두 도시가 손을 잡은 셈이다.

‘토지’ 작가 박경리의 동상이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한국학과 건물 옆에 세워진다. 그 동상이 얼마 전 현지에 도착했다. 러시아 푸시킨의 동상이 서울에 건립된 것에 대한 화답이다. 양국 교류뿐 아니라 러시아 내 첫 한국인 동상이란 점에서 뜻깊다. 공교롭게도 대한제국의 공관 건물에 푸시킨이 거주했던 기록이 있고, 이곳 네프스키 대로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북방의 베니스에서 지낸 푸시킨의 시가 절로 떠오르는 오늘이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