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21일 오후 청와대는 TV 중계방송을 보다 일순간 탄식과 함께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화면에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문을 읽어내려 가고 있었다. “(수도가 서울로 정해진 것은) 조선왕조 창건 이후부터 경국대전에 수록돼 장구한 기간 국가의 기본법 규범으로 법적 효력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른바 ‘서울=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논리. 그 때문에 “개헌을 하지 않는 한 수도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2시간 정도 후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반응에는 당혹감이 뚝뚝 묻어났다. “처음 들어보는 이론이다.” 법률가 출신 대통령조차 금시초문이라는 얘기.
관습헌법이 최근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낙연 총리가 지난 20일 한 인터뷰에서 세종시로의 수도 이전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 논리를 이유로 든 것. “국민 마음속에 행정기능의 상당 부분이 세종으로 가는 것까지는 용인하지만 수도가 옮겨가는 걸 다수의 국민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관습헌법에다 다수의 반대를 내세운 총리의 주장은 채 이틀도 가지 못했다. 당장 후폭풍이 만만찮았다. 세종시를 비롯, 충청권에서 난리가 났다. 무엇보다 청와대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국민 의견을 물어 수도 이전 개헌을 하겠다’던 대통령 공약과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논란은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관습헌법이라는 유령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먼저 이낙연 총리가 어떤 사람인가. 최근 살충제 계란파동에 부적절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은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 대한 일갈이 그를 잘 보여준다. “제대로 답변 못 할 거면 기자들에게 브리핑하지 말라.” 한마디로 ‘깐깐함을 넘어 완벽주의자’. 이런 그가 수도 이전 발언이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결국은 총리의 본심 아니겠냐.”(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 물론 이 총리는 지난 26일 대전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수도 이전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재차 해명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국민의견을 물을 것인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이전까지 지방분권 개헌안을 마련,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언한 상태. 실질적 지방분권을 위해선 수도 이전이 ‘필요조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렇다면 결코 시간이 넉넉지 않다. 원전폐기 정책처럼 공론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수도 이전 방침을 공언하고 적극 국민 설득에 나서든지, 서둘러야 한다.
총리의 모호한 태도 못지않게 중앙 정치권과 언론의 상대적 무관심도 관습헌법이라는 유령의 든든한 뒷배다. 충청 정치권이 즉각 발끈했지만, 여당도 야당도 지도부는 시큰둥했다. 그 흔한 정당 대변인의 논평 하나 없었다. 서울과 세종으로의 행정부처 분할에 따른 비효율을 입만 열면 질타하면서도 궁극적 해결책인 수도 이전에 대해선 다들 묵묵부답이다. 보수야당이야 원래부터 수도 이전에 반대해왔던 터라 ‘그럴 수 있겠거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당의 태도는 유감이다. “대표적인 성문헌법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불문헌법인 관습헌법이 국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된 특별법의 발목을 잡을 수 있나?” 헌재의 위헌결정 당시부터 비판받아온 비상식적 논리다. 또다시 대선 공약의 숨통을 옥죄는 상황을 수수방관해선 안 된다는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서울지역 언론들도 애써 이번 논란을 무시했다. 수도 이전으로 정치 권력이 서울을 빠져나갈 경우 매체 파워가 줄고 광고 등 영업에도 불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음 직하다.
그렇다면 충청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 정치권과 언론의 침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도 이전을 ‘이웃사촌이 논 사는데 배 아픈’ 정도로 인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정말 단견이다. 권력도, 돈도, 사람도 모두 빨아들이는 서울의 ‘폭식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지방분권 해봐야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이다. 수도 이전은 그간 서울 중심주의 사고와 이에 기반한 국정 운영 방식 틀을 깨뜨릴 수 있는 마지막 처방전이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제2위 도시, 부산이 총대를 메면 어떨까. 이미 부산시는 자체 ‘지방분권개헌안’을 마련, 국회 개헌특위에 낼 정도로 중앙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상태. 이젠 한 걸음 더 나가 수도 이전을 통해 수도권 패권주의와 한판 ‘맞짱’ 을 뜰 차례다. 그래야 부산도 살고, 수도권도 살고, 대한민국이 산다!
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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