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킨’이란 이름을 처음 만난 곳은 동네이발소였다. 이발의자의 등받이가 높아서, 좌우 팔걸이에 가로질러 놓은 빨래판에 걸터앉아 머리를 깎던 꼬마 시절. 가운 틈새로 들어간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꼼지락거리다가 이발사 아저씨에게 쥐어박히던 그 괴로운 시간에, 거울에 비친 액자 속 푸시킨의 글은 위로가 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것이 그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첫 구절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러시아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러시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푸시킨시(市)가 있고 푸시킨광장과 푸시킨미술관, 그리고 도처에 그의 동상들이 있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광이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38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많은 걸작을 남긴 천재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업적은, 구어체에 기반을 둔 풍성한 러시아 문학 언어를 창조하고 확립함으로써, 이후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가 이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문학 외에도 무소르그스키와 차이콥스키의 음악, 그리고 볼쇼이극장의 발레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러시아의 찬란한 예술은, 사실 19세기 이후 갑자기 꽃을 피운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이전 러시아 땅에는 예술적 성과라 할 만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러시아 예술은 문학이 앞장서고 음악과 미술은 그로부터 영감을 받으며 뒤를 따르는 형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문학이 풍성한 언어로 제대로 개화한 것은 바로 푸시킨에서부터였다.

그런 푸시킨이 아프리카 혈통을 지닌 사람이라는 건 좀 의외의 사실일 것 같다. 그의 초상을 뜯어보면 곱슬곱슬한 구레나룻과 코, 두툼한 입술에서 흑인의 특징이 완연하다. 푸시킨의 외증조부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은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일곱 살 때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에게 인질로 보내졌다가 한 해 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넘겨진다. 간니발은 대제의 총애 속에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루이 15세의 군대에 들어가 대위까지 진급한 후 러시아로 돌아온다.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는 18세기 초 서구화 대개혁을 통해 변방의 삼류국가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 열강 러시아제국으로 탈바꿈시킨 군주이다. 그가 온갖 저항을 무릅쓰고 밀어붙인 대개혁의 파트너는 귀족 출신의 주류들이 아니라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의 인물과 외국인들이었다. 후진적 러시아를 근대화하여 세계열강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도움이 된다면 외국인이든 미천한 가문 출신이든 가리지 않고 귀하게 쓰겠다는 것이 대제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그런 맥락에서 흑인 노예 간니발을 좋은 모델로 키운 것이다. 대제는 간니발의 성공사례를 통해, 아랍인이나 흑인도 지적 능력이 다르지 않으며, 사람은 인종이나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돌아온 간니발은 소장의 계급을 하사받고 에스토니아 탈린 지역의 총독이 되어 영화를 누린다. 그의 장남 이반은 러시아제국 군대의 2인자 위치까지 올랐고, 다른 아들 오시프는 찬란한 러시아 문화예술의 출발점이 되는 푸시킨을 외손자로 두었다.

표트르 대제와 간니발, 그리고 푸시킨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감한 상황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뚫린 구멍을 메우며 훌륭하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중 일부는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국인, 특히 유색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구 격감의 시대에 대한민국이 소멸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지속하려면 외국인들의 대량유입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단일민족’과 같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또는 외국의 원조로 연명하던 불과 얼마 전의 일을 잊고 우월감에 빠져, 이들을 경멸하고 좌절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요소가 되는 길로 몰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오늘 우울한 얼굴로 나를 스쳐 간 그들 중에는 상처받은 간니발과 푸시킨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경성대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