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패장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늘 패장일 수는 없다.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라고 해도 칼을 갈며 미래를 다시 도모한다. 권토중래(捲土重來)니 와신상담(臥薪嘗膽), 절치부심(切齒腐心)등속의 성어가 유독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테다. 패배는 쓰디쓰지만 좋은 교훈이다. 패인을 분석하고 힘을 다시 축적해 승자로 우뚝 설 때는 더욱 극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엔 쓴잔을 마셨다 잠행 후 화려하게 부활, 대권을 거머쥔 몇몇 대선 패장도 같은 경우겠다.
지난 대선의 패장들이 돌아왔다. 홍준표 후보는 대선 패배 55일 만에 당 대표로 복귀했다. 안철수 후보 또한 석 달 만에 당권 도전에 나서며 정치 일선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들 패장을 두고 당 안팎으로 비난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대선 패배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복귀하냐는 얘기다. 그러나 정치적 선택은 그들의 몫이고 시기가 빠르다고 탓할 일도 아니다. 다만 이들 패장이 복귀하며 내건 명분 등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가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유한국당이 대선 패배 이후 새롭게 변하겠다며 발표한 ‘혁신선언문’부터 보자. 비록 당 혁신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됐지만 홍 대표의 지향점을 볼 수 있는 대목이어서다. ‘신보수주의’ 기치를 내건 혁신선언문은 ‘긍정적 역사관’ ‘대의제 민주주의’ ‘서민중심 경제’ ‘글로벌 대한민국’ 등을 주요 가치로 꼽았다. 류석춘 혁신위원장은 신보수주의 개념에 대해 “정의와 형평을 바탕으로 양극화와 불공정한 기득권을 타파하고 활기차며 따뜻한 공동체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혁신선언문이 내건 주요 가치가 과연 ‘혁신적’인 것인가는 일단 차치하자. 하지만 그중 서민중심 경제라는 표현은 눈에 띈다. 혁신위는 서민중심 경제를 “부자에게는 자유를 주고 서민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럴듯하긴 한데 무슨 소리인지 아리송하다. 부자에게 자유를 주되 서민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서 ‘서민중심’이란 말인가. 이게 따뜻한 공동체 발전을 추구하는 신보수주의인가. 차라리 대놓고 우클릭하는 게 낫지 서민중심 경제니 따뜻한 공동체니 하며 생경한 말을 끼워넣어 더 우스꽝스럽게 된 꼴이다. 이러니 당 내부에서조차 어느 방향으로의 혁신이냐는 자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국민의당 대표 선거전에 뛰어든 안철수 전 대표의 복귀 일성도 생뚱맞긴 마찬가지다. 그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극중(極中)주의’란 단어를 꺼내들었다.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국민에게 도움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극중주의”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극중주의로 정권을 잡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극중주의는 마크롱의 프랑스적 중도를 서방 언론이 ‘극단적 중도’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용어다.
어쨌든 극단적이라는 의미의 ‘극’과 중간이라는 ‘중’이 한데 어울릴 단어인지부터 헷갈린다.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안 전 대표의 설명은 더 이상하다. 그렇다면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우파는 극우인가.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는다. 좌도 우도 아닌 엄정한 중도 노선을 가겠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그제 그는 혁신비전 간담회에서 “국민의당에 대해 국민들이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정치는 개혁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안다”며 당 정체성 유지의 뜻을 비쳤다. 분야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오가는 게 그가 말한 극중주의인가. 자꾸 말을 덧붙이다 보니 스스로 정체성이 오락가락하는 듯하다.
패배가 가슴아픈 일이긴 해도 부끄럽지 않은 건 다음을 도모할 수 있어서다. 홍 대표와 안 전 대표도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을 추스르기 위해 조기 등판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복귀와 함께 내건 ‘혁신’이니 ‘극중’이니 하는 말의 내용물은 실망스럽다. 처절한 반성과 주도면밀한 준비는커녕 이런 애매모호하고 스스로도 헷갈릴 만한 레토릭에만 기대 훗날을 꿈꾼다니 그들의 용감무쌍함이 놀라울 뿐이다.
두 패장의 지난 대선 득표율은 각각 24.03%, 21.41%로 합쳐서 문재인 대통령의 41.08%를 넘었다. 하지만 최근 두 당 지지율은 각각 15~16%, 5~6%에 그치고 있다. 통상 새 정부 초기의 여당 지지율이 높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두 당 지지율은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물론 두 패장은 이처럼 추락일로인 당을 살리기 위해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들이 새롭게 내건 ‘혁신’과 ‘극중’을 통해 당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대선 지지층조차 상당수 마음이 떠나버렸는데 이래서야 5년 뒤를 어떻게 도모할까.
논설실장 jj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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