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은 여전히 유효한 로망이다. 2012년 대선 출사표를 던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공약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위한 칼퇴근법 도입'이 그 예다. 손 전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은 생산성 있는 복지사회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일자리는 늘리고, 노동시간과 비정규직은 줄이고, 고용의 질은 높이겠다'는 문 대통령의 일자리 다짐도 궤를 같이하지 싶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근로시간은 최고 수준이지만 생산성은 최고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에서 비롯되는 소득 불균등이 심한 대한민국이다. 지난 3월 나온 OECD '구조개혁평가보고서(Going for Growth 2017)'의 지적이다. OECD가 구조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포용적 성장을 꼽았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공정한 부의 분배와 기회 균등,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보고서가 공개될 무렵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철폐 등을 공론화하며 '사회적 총파업'을 예고했다. 조기 대선 국면에 맞춰 핵심 노동 의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다고 결기를 세웠다. 그 근거는 '전체 노동자 절반이 비정규직이며, 4명 중 1명은 저임금 노동자'라는 점에서 OECD 보고서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2015년 기준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766시간보다 347시간 많다. 연간 실질임금은 구매력평가(PPP) 기준 3만3110달러로, OECD 평균인 4만1253달러의 80% 선이다. 일본과 비교하면 49일 더 일하고도 연간 실질임금은 92.5%, 시간당 실질임금은 4분의 3 수준에 그친다.
지난달 28일 시작해 내일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총파업 주간'에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문제가 유독 두드러진 배경이다. 그 분수령은 문 대통령 취임 50일째인 지난달 30일 서울에서 치러진 '6·30 사회적 총파업' 대회였다. 사회대개혁의 열망으로 노동 적폐를 청산하자며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 등의 지위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이 앞장서고 주도하는 집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 대통령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리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해 비정규직 차별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겠다고 공약했으니 '유령 취급을 받던' 이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맞은 셈이다.
이틀 동안 총파업을 벌인 학교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지만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임금 격차가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승진이나 승급 없이 1년 차와 같은 직급인 무기계약직은 가짜 정규직'이라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박근혜 정부 비정규직 대책의 후유증이 그대로 나타난다.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무더기 전환하면서 그나마 고용은 안정됐다지만 임금과 근무여건 등에서 차별이 여전한 것이다. 이들이 문 대통령의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70만 명의 절반이 속한 학교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들의 파업으로 당장 일부 학교에서 급식이 중단됐지만 오히려 이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전과 달랐다. '공무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의 임금 체계를 바꾸고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최저임금은 더 고약하다. 지난달 29일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가 또 법정 시한을 넘겼다. 이날 6차 전원회의에서 노동계는 현재 시간당 6470원에서 3530원 오른 1만 원을 주장했고, 사용자 측은 155원 오른 6625원을 제시했다. 54.6%와 2.4%의 인상률만큼 이 문제에 대한 시각차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정부 방침대로 최저임금을 3년에 걸쳐 1만 원으로 올리더라도 늘어나는 인건비가 140조 원에 달한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 사이 지난 5일 8차 전원회의도 소득 없이 끝났다. 오는 16일이 최종 합의 마지노선이다.
노동계는 관련 법과 제도 개선을 위한 총력 투쟁을 예고했고, 일자리 문제를 1호 과제로 놓은 문 대통령은 '1년 정도 지켜봐 달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대화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벽은 항상 있었다. 그걸 극복하며 세상이 변해왔다.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가뒀다'는 말이 왜 나왔겠나. 누구라도 앞서 이야기하고, 현실을 서로 납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냥 오지 않는다. 사회적 총파업 주간이 모두에게 던진 숙제다.
논설위원 jsdo@kookje.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