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어느 봄날이었나. 부산문화재단 이사회 회의를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였다. 김지석 BIFF 수석 프로그래머가 좌중 모두에게 영화 초대권 몇 장씩을 나눠줬다. 사람마다 얼굴에 즐거운 웃음이 번졌고, 나도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에 농담이라곤 모르던 그분이 봉투를 건넬 듯 말 듯 왕복운동을 하더니 손을 멈추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봉투를 받아들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너 진짜로 올래, 안 올래?' 그 소리 없는 물음이 지금도 마음을 울린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나마 영화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이때부터다. 김지석이란 사람의 진지함, 그리고 같은 말이지만 영화에 대한 김지석의 진지함을 깨달은 계기였다.

그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에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던 난쟁이'라고 자신을 낮춰 말했다. 이때 거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동호 BIFF 이사장이다. 그는 김 이사장이 '큰 우산'이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이상으로도 여긴 것 같다. 2011년 가을, 김 수석은 광주영화제 개막작인 '인산인해'(차이샹쥔 감독)를 관람하기 위해 손수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달려갔다.

단 한 편의 영화를 보려고 먼 길을 한숨에 달려오는 열의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차이 감독과 당시 광주영화제 관계자들은 지금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이것은 김동호 이사장에게서 배운 것이다. 2010년 김 이사장이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리는 작은 영화제에 참석한 일은 유명하다.

그가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대부분 유럽 공항이 마비된 때에 무려 39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비행기로, 버스로, 승용차로 갈아타며 달려간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28세의 집행위원장에게 꼭 참석한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신뢰가 생명'이란 소신이 빚어낸 이 무지막지한 전설을 계승한 것은 김지석 수석이었다. 이 점에서 김동호 이사장의 계승자는 김 수석이다. 달리 말해 김 수석은 또 하나의 거인이었다.

BIFF가 급성장한 데에는 이 거인들의 피땀이 있었다. 2014년 '만해대상'을 받으러 한국에 온 이란의 거장 마흐말바프 영화감독은 '투 킴'(Two Kim)이 없었다면 자신과 한국, 한국 영화와 인연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스터 김동호'가 큰 그림을 그렸다면 '미스터 김지석'은 아주 치밀하게 BIFF를 키웠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가슴이 아려 온다.

김동호 이사장,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밝게 드러난 거인이라면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BIFF를 보살핀 거인이었다. 지난달 '포스트 BIFF' 행사에서 방글라데시 영화감독 파루키가 "자신의 영화 '텔레비전'이 고향인 부산에 돌아갔다"고 기뻐하며 김 수석과 부산 관객에게 축하 영상을 보낸 일. 지난 3월 '아시아 영화의 힘' 행사에서 공개된 뒷이야기로 올해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감독이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 교장 직을 흔쾌히 맡는 대신 김 수석에게 '간장 게장'을 사 달라고 했다는 일.

이 꿈같은 일들이 현실로 이뤄진 데에는 그야말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김 수석의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BIFF를 준비하며 그는 말했다. "죽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다했다." 부산시와 정부 그리고 영화계의 보이콧이란 이중 압박 속에서 BIFF를 지키려던 그는 외로웠다. 또 예년보다 영화제 외형이 다소 축소됐다는 점만을 부각하는 평가 속에서 그는 괴로워했다. 이윽고 지난 19일, 우리 곁을 떠났다.

누가 이 죽음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나. 지난 1월 그는 오래 고민한 끝에 얻은 결론을 내게 말해줬다. 대체 이리 욕을 먹어가며 BIFF를 지키려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 물어본 결론이다. 그것은 초심, 곧 아시아 영화 발굴·육성이고, 그 실마리는 독립영화 발굴·육성이란 것이다.

그 높은 뜻을 함께 기리고 싶다. BIFF의 핵심 가치는 아시아이며, BIFF는 아시아 영화의 교류와 동반 성장이란 대의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국내를 제외한 아시아 전역의 영화계에서 더 사랑받고 존중받은 김 수석. 자신의 몸과 불화(不和)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영화하고만 화해한 사람. 그와 함께 일한 것은 영광이었다.

필로아트랩 대표·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