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미세먼지와 황사가 주위를 어지럽혀 몸살을 앓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완연한 봄 5월, 포근한 신록과 화창한 햇살, 선선한 바람이 어김없이 찾아와서 우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그래서인지 생명이 약동하는 설렘, 성장의 기쁨, 사랑과 보살핌, 감사와 공경의 마음들도 한 뼘 자라는 듯하다. 더욱이 대선을 치른 후 새 시대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5월이기도 하다.
시대에 대한 열망이 커지는 이때 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도착할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이의 입이 모이면 쇠도 녹일 만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다. 대선을 치르기까지 일련의 변화들은 바로 많은 이의 이런 숨은 노력과 간절함이 모여 가능했다. 하지만 대선 이후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의 선출은 변화의 시작점이다.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려면 우리가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새 시대의 주체가 될 욕구는 충분한지도 한번 점검해봐야 할 때다.
다행인 것은 시민사회 전반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의 분위기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관객문화의 영역만 봐도 그렇다. 처음 관객운동에 뛰어든 6년 전만 해도 관객연대를 일구는 활동은 예전에는 카테고리가 없던 영역이었다. 그래서 관객들의 문화를 연구하려면 두꺼운 책이나 논문을 뒤적거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SNS 매체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민들의 영화문화 지형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즐겁게 영화문화를 즐기고 문화생산자로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개인과 공동체, 단체들이 다채로워지고 있다.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진 대안상영 프로그램들도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생겨나고 있다. 춘천의 일시정지시네마, 서울의 극장판 등이 기획한 프로그램들은 기존의 예술영화전용관들이 미처 살피지 못했던 단편영화, 독립영화, 독립영화인들에 주목한다. 부산에서는 옥상달빛극장, 다큐싶다, 초록영화제, 작은영화영화제 등이 영화문화의 저변을 넓혀가며 시민들을 위한 정기상영 프로그램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SNS를 통한 시민 관객들의 개인적인 활동들도 왕성하다. 영화의 첫 대사만을 기록하는 관객, 그림으로 영화를 재해석한 관객, 촬영지 답사기를 연재하는 관객, 영화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관객, 엽서, 배지와 같은 기념품을 비평하고 수집하는 관객 등 영화문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향유하는 멋진 관객이 많다. 이들의 활동은 비단 개인적인 활동을 넘어 영화문화 전반에 영감과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화예술활동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영화문화에서도 시민 주체의 문화가 싹트고 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가꾸어온 역량 있는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퉁이극장이 시민 중심 영화교육, 상영프로그램의 보급에 사명감을 갖고 계속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곳곳의 의욕 있는 관객들을 프로그램과 매개하고 응원할 창구의 역할이 시민사회에 활력을 주는 꼭 필요한 일임을 시민들을 만나는 현장에서 몸소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화 프로그램에서 가장 소홀한 것이 관객층과 두터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다. 문화와 시민을 잇는 문화매개 활동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개선방안과 실천에 대한 투자는 더디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데 들이는 시간만큼 그 기획을 살찌울 좋은 관객들을 만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건만 문화프로그램을 대하고 평가하는 관성의 벽은 높은 듯하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 아는 사람들과 하는 활동이 전부가 아니라면, 발로 뛰고 묻고 구하고 수소문해서 많은 시민을 만나야 한다. 관객은 아쉬울 때 찾는 양적 수치가 아니라 그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시대는 관객에 대한 시각의 변화로부터 오지 않을까. 이제는 적극적인 향유층, 숨어 있는 시민사회의 활동가라 불릴 만한 이들을 발굴하여 지원하는 문화매개 활동이 프로그램의 질과 더불어 균형감 있게 성장해야 할 때다. 시민 주체로부터 생성되고 있는 기발하고 창의적인 다수의 활동은 아직도 명명되거나 분류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시민들은 약동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을 유연하게 품고 촉진할 다양한 제도와 지원, 재원들도 조속히 마련되었으면 한다. 든든한 밑받침이 생긴다면 시민 관객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모퉁이극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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