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예의가 물처럼 우리 사회에 흐르게 하려면 윗사람부터 예의를 지키면 된다. 왜냐하면, 예의의 본질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만 사는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예의를 지킬 수 없다. 예의를 지킬 대상이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관계는 대체로 윗사람이 주도한다. 그러니 거기서 예의가 시작되는 게 좋고 자연스럽다. '아랫사람'은 그렇게 전해져 온 예의 속의 마음을 받아 응대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예의다.
예의가 깨져버리는 순간은 그것이 일방적으로 강요될 때이다. 사리분별을 놓고 말씨름을 하다가 논제와 상관없이 갑자기 "너 몇 살이야?" "어린 놈이 감히" 하는 윽박과 함께 말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다. 그 말을 들은 이가 "그러는 당신은 몇 살이냐?" "주민등록증 까자!"라고 받으면 만사는 끝난 것이다. 토론이고 예의고 기대하기 어렵다.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태도가 관계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잘 들여다보면,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오래된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볼 수 있다. 예의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곧잘 여긴다는 점. 기수가 높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합리성과 관계없이 남을 누르고, 행동과 생각까지 강요하는 문화가 있다는 점.
봄이 오고 새 학기가 되면 듣는 소식이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술을 지나치게 강요하고, 심한 기합을 주고, 모욕감을 주면서 구타했다는 보도다. 올해도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와 관련해 몇 차례 비슷한 소식이 있었다. 혹독하고 불합리한 신고식은 사고로 이어져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로 연결되기도 했다.
일정한 통과의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부 청년과 청소년의 '과도하고 혹독한 신고식' 관행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고, 청년실업이나 출산장려 같은 주제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적 문제라 생각한다.
일부 대학생이나 청소년이 어쩌다 이런 불합리하고, 쓸데없이 혹독하기만 한 '신고식 문화'에 젖었을까? 원래 성정이 권위적이고 동정심이 없어 그럴까? 그런 경우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어른한테서 보고 배운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어른 세계가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보여준 세상을 되짚어보자. 대학에서는 괴상한 권위주의를 앞세워 부당하게 타인을 억압하는 일이 지금도 일어난다. 사회에서는 이너서클 또는 그들만의 집단이라는 성을 쌓고, 복종하지 않으면 배제한다. 배제되어 패배로 내몰리면 너무 큰 상처를 입는 사회 구조여서 쉽사리 나만의 길을 택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성이나 능력보다는 나이, 기수를 앞세워 '다름'을 억누르는 게 훨씬 편하고 효과적이니 그런 쪽으로 발달한 문화는 쉽게 쇠퇴하지 않는다. 개성과 창의성이 푹죽처럼 터지는 신입생 환영회도 꽤 늘었다. 하지만 취해서 쓰러지도록 술 먹게 하고 기합 주고 복종을 강요하는 대학문화가 여전히 굳건한 것은 우리 사회 어른 세계의 문화와 궤를 같이하는 동심원이다.
'과도하고 혹독한 신고식' 문화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 저 홀로 존재하는 독특한 사회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병폐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예의가 깨진 세상이다. 예의가 깨진 것은 일방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키는 것이 예의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예의는 서로 지키는 것이다. 예의의 본질은 관계에 있다.
이 문제를 개선하는 접근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청(소)년층을 위한 인성·예의·인문에 관한 교육이나 프로그램이다. 인성교육 같은 것을 관련 법을 만들어 인위적으로 하는 데 반대하는 분도 많다는 걸 안다. 그래도 일정한 효과는 있을 것이다. 다만, 하려면 잘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통로가 있어야 하고 내실이 탄탄해야 한다.
다른 접근법은 예의의 문제를 정치와 사회 구성의 원리로까지 확장한 공자의 말씀으로 대신한다.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란 바른 것이오. 그대가 앞서 바르게 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소?"('논어' 안연 편) 어른들이 먼저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예의는 상호관계이며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문화부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