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세계 각지의 이색 대회 중에 '하이힐 달리기'란 게 있다. 여성들이 일정 높이 이상의 하이힐을 신고 빨리 달리기를 하는 대회다. 유럽에서 시작돼 이제는 여러 도시에서 자주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백화점에서 이벤트 형식으로 하이힐 달리기 대회를 연 적이 있다. 요즘에야 덜하지만 초창기만 해도 그토록 뒷굽이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전력질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미국 작가 크리스토퍼 몰리는 "하이힐은 '이마'에 키스를 당한 일이 있는 여성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키가 작은 것을 빗댄 우스갯소리겠지만 실제 중세까지만 해도 하이힐은 남성 전유물에 가까웠다. 17세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하이힐을 즐겨 신었고 귀족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보편화됐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하지만 당시 하이힐은 뒷굽바닥이 넓적해 사실상 키높이 구두쯤으로 보는 게 옳겠다.

하이힐이 여성 전유물로 변한 것은 18세기 무렵이지만 요즘처럼 뒷굽이 뾰족해진 건 20세기 중엽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여성 패션의 한 부분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해온 것. 여기에다 착용 때 늘씬해 보이고 걸음걸이까지 모델처럼 바꿔주니 여성들에겐 요술구두인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늘은 있는 법. 아름다움의 이면에 발 변형 등 인체에 여러 악영향을 미친다는 보고도 적지 않다.

이처럼 일장일단이 있으니 하이힐 착용은 여성 자신의 선택의 몫. 그런데 일부 직장에서 이를 의무화하는 게 문제다. 실제 최근 영국 의회에서 하이힐 강요 등 직장 내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성차별을 두고 열띤 토론회가 벌어졌다. 2015년 한 회계법인에서 근무하던 20대 여성이 규정된 5㎝ 이상의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되자 금지법 제정 청원서를 의회에 낸 것. 여기에 약 15만 명이 서명하면서 토론회를 여는 등 이 문제가 공론화됐다.

영국 정부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하이힐 착용이나 메이크 업 등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기업들의 드레스코드 규정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관련법 제정이 머지않은 듯하다. 그나마 직장 내 성차별이 덜하다는 유럽에서마저 아직도 이런 문제로 시끄러우니 우리 입장에서도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때마침 어제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한 영국 여성의 외침이 기나긴 성차별 폐지 역사의 또 다른 한 페이지를 장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장재건 논설위원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