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날 고건 총리는 가장 먼저 서가에 꽂혀 있던 '헌법학 개론' 책부터 꺼내 들었다고 한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직무정지 사태로 권한대행 역할을 맡아야 했지만 참고할 매뉴얼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헌법 또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다고만 돼 있을 뿐 구체적인 지침은 규정돼 있지 않았다. 결국 고 권한대행이 택한 건 '상식과 원칙' 두 가지 기준이었고 최대한 소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가 가동됐지만 여전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없다. 학자에 따라 현상 유지에 국한돼야 한다거나 적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해도 된다는 등으로 의견이 갈린다. 그러다 보니 황 권한대행은 고 권한대행이 63일간 직무를 대행했던 사례를 면밀히 연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 권한대행이 고 권한대행의 사례를 참고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두 사람의 행보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고 권한대행과 달리 황 권한대행은 적극적으로 대통령급 의전을 요구하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 방문 때 대통령에 준하는 의전을 요구했다 논란이 일었던 게 대표적 사례다.

이뿐 아니라 지난달 서울 구로동 디지털산업단지를 방문할 때는 7분이나 일대의 교통이 통제돼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긴 총리 시절부터 '서울역 KTX 승강장 관용차 진입' '오송역 버스정류장 주차' 등 잇단 과잉의전 논란으로 '의전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터다.

과연 의전왕답게 이번엔 '황교안 권한대행 기념시계' 때문에 시끄럽다. 지난해 말 권한대행 직함을 명시한 기념시계를 만들어 각계 인사 면담이나 사회복지시설·군 부대 등 방문 때 나눠준 사실이 드러난 것. 이러니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거나 '대통령 놀이'에 재미들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긴 이 정도에 그친다면 굳이 대통령 놀이라고까지 할 건 없다. 최근엔 규제 개혁 국민토론회란 명분으로 생방송 일문일답 토크쇼까지 여는 등 노골적으로 대선 행보를 이어가며 대통령 행세를 짐짓 즐기고 있는 듯해서다. 그러면서 정작 특검의 수사 기간 연장 등 민감한 사안에는 미적미적에 묵묵부답이다. 권한을 행사해야 할 일에는 손을 놓으면서 엉뚱한 논란만 일으키는 황 권한대행의 대통령 놀이를 언제까지 봐야 할까.

장재건 논설위원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