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는 언젠가 치명적인 암이 되어 반드시 생존을 위협하고 우리 모두를 능멸한다. 지금 온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국난은 엄밀히 살펴보면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가 끝내 곪아 터진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17일, 부산 해운대 추리문학관에서 열린 25회 '추리문학의 밤' 행사 팸플릿에 쓰인 문구다. 추리문학관장 김성종 작가는 현 시국이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에서 비롯됐다며, 올해 행사에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소장과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를 펴낸 안재성 작가를 초청해 한국의 현대사를 들춰보았다.

첫 강연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나섰다. 임헌영 소장은 김성종 작가와의 오랜 인연을 밝히면서 올해 행사 취지를 듣고 기꺼이 강연을 수락했다며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까지'라는 주제로 말을 이어갔다. 1994년부터 시작된 사전 편찬 작업은 자료 취합과 정리 후 2001년 본격 작업에 돌입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국회의 예산 삭감, 수록예정자의 후손과 보수단체들의 이의신청과 가처분신청으로 2009년 11월에야 친일인명사전은 빛을 보게 된다. 무려 15년 만이다. 임헌영 소장은 이광수, 서정주, 김동인 등 문학인부터 이승만, 박정희까지 민족과 국가를 배신하고 친일행각을 벌인 사례들을 조목조목 밝히며, 유럽 국가들의 엄정하고 냉혹했던 나치 부역자 처단 과정과 비교했다. 그러면서 치욕스러운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과거사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강연 후반, 임헌영 소장은 국민의 모금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다며, 내년 건립 예정인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모금과 모바일 앱으로 출시한 친일인명사전 구매에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나는 강연을 듣는 내내 사전 편찬 작업의 지난한 과정과 노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전 편찬 과정을 소재로 한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 '행복한 사전'은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가 원작이다. 영화감독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원작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영상매체로 잘 옮겨놓았다. 주인공 마지메는 대형 출판사의 영업부에서 근무하다 사전편집부로 이동한다. 사전편집부에는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일생을 사전 만드는 데 바친 아라키, 새내기 니시오카와 계약사원 사사키뿐이다. 사전편집부는 새 국어사전 '대도해'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대도해(大度海)에는 그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23만 자를 목표로 기획된 대도해 편찬 작업은 표제어를 선정하고 5000 명 이상의 전문가에게 원고를 의뢰해 편집과정을 거치고 다섯 번의 교정 작업을 하는 동안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그 사이 인터넷과 전자사전이 등장하고 새로운 말은 끊임없이 출현한다. 여러 사정으로 편찬 작업이 중단되고 동료들도 하나둘 떠난다. 하지만 마지메의 단어 수집은 멈추지 않는다. 여러 난관에도 흔들림 없이 대도해 편찬을 마무리한다. 그야말로 우공이산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는 일본 국민의 이런 장인정신을 마주할 때마다 감탄을 넘어서 섬뜩한 기분이 든다. 사전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서적이다. 계속 새로운 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지메의 말처럼 애초에 '살아 있는 사전'을 만들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정판을 내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전이란 무엇인가? 한 나라의 출판물 수준을 가늠하는 자존심이자 상징물과도 같다. 개화 초기 일본의 선각자들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선하여 외국어를 번역하고 사전을 편찬했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사전류를 보면 일본의 국력이 느껴진다. "자국어 사전 편찬은 국가의 위신을 걸고 해야 한다"는 마지메의 말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일본의 저런 장인정신 이면에는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무한한 책임의식이 숨어 있다.

이번 국정 농단 주범들의 청문회를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저런 한심한 자들이 이 나라 통치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단 말인가?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저들의 뻔뻔하고 무책임한 말들을 들으면 개탄스럽다. 우리는 지금 과거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이 나라를 구한 건 언제나 민중의 힘에서 나왔다. 광장의 촛불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기려면 다시는 저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