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남 광양의 한 선박 수리업체 대표가 부산시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법정관리 중인 한진해운 거래기업 중 회생채권이 있는 기업들을 위해 부산시가 서울지법 파산부에 우선변제 협조 요청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했다. 원래 선박 수리는 등록된 항구에서 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 업체는 임시허가를 받아 부산에서 수리했다. 미수금은 2억여 원이었다. 전남도와 광양시가 신경을 전혀 안 써 고민하던 차에 부산에서 그 소식을 듣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화했다고 한다.
시에 따르면 한진해운 회생채권을 보유한 순수 부산기업은 200여 개, 금액은 107억 원 정도이다. 이 중 85%가 1억 원 미만이다. 한 선용품 공급업체는 2, 3차 밴드에 밀린 대금이 체불돼 가압류당했고, 수입 부품을 사용하는 한 선박 수리업체는 외국업체에 대금을 이미 지불한 상태라 파산위기에 처해 있다. 업체 상당수가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적지 않은 직원이 실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해운항만물류를 기반으로 한 지역경제가 가랑비에 옷 젖듯 무너지고 있다.
한진해운 사태가 넉 달째 접어들면서 국내 해운은 붕괴됐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해운업은 파산 시 파급 효과가 상상을 초월한다. 선주협회는 법정관리 전 피해액을 17조 원으로 예측했다가 지난달 20조 원으로 증액했다. 선복 공유 해외선사들과 각국의 항만당국 및 터미널, 화주, 포워더 그리고 지역 협력업체 등에게 전례 없는 엄청난 피해를 입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불명예를 안겼다.
나락에 떨어지면 이를 계기로 교훈을 얻어야 되는 법.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최근 한진해운 몰락에 대한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냈다. 치킨게임에 따른 승자독식의 글로벌 해운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제시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원양 정기선사가 흔들리면 정부의 적극적인 금융지원과 함께 자율적 구조조정 또는 정부 주도형 인수합병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한진해운 사태에 직접 대입해보자.
우선 정부는 한진해운에 단기 유동성 지원에 그쳤고, 법정관리 신청 전 정상화를 위해 부족한 3000억 원 지원을 거부했다. 반면 사실상 국영기업인 대우조선해양에는 자본확충 형태로 총 4조2000억 원을 지원했다. 민간기업(해운)은 나 몰라라 방치했고, 국영기업(조선)은 정상화 실패 시 입을 지분손실 리스크를 우려해 몸을 사렸다.
대주주의 도덕성도 빼놓을 수 없다. 몸집 줄이기나 자구책은 물론 사재 출연도 인색했다. 과거 조양상선 오너는 법정관리로 가기 전 3개월 동안 사재를 털어 운영자금으로 물류대란을 막았다.
정부 주도형 인수합병이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다. 해운업계에선 이미 공급과잉으로 운임이 폭락하자 비용절감을 위한 합병이 이뤄지고 있다. 올 들어서만 세계 3위 프랑스의 CMA-CGM은 싱가포르 NOL을, 5위 독일의 하파로이드는 두바이에 본사가 있는 UASC를 인수했다. 최근에는 1위 머스크가 독일의 함부르크쥐트 합병으로 몸집을 또 불렸다. 아직도 전문가들은 차라리 정부가 전권을 쥐고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합병시켰더라면 지금 같은 최악의 상황으론 가지 않았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정부나 금융권의 지원도 해외에선 빈번하다. CMA-CGM은 2009년 국부펀드로 살아났고, 하파로이드는 함부르크시가 지분을 인수해 회복했다. 최근 대만정부도 양대 해운사인 에버그린과 양민에 수조 원의 지원을 결정했다. 반면 한진해운은 KMI가 지적한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정부는 정신을 차렸을까. 한 달여 전 정부는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내놨다. 선박 신조지원, 선박금융펀드와 함께 한진해운 미주노선 인수와 세계 최대 해운동맹인 2M 가입을 통해 현대상선을 세계 5위권의 국적선사로 키운다는 장밋빛 전망은 대한해운의 등장으로 불과 한 달 만에 수포가 됐다. 최근에는 2M 가입마저 미지수다. 한 전문가는 지난 5월 보스턴컨설팅그룹이 향후 5년간은 해운업이 불황이라는 보고서를 냈지만 정부의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의 추진과제는 2018년까지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내놓는 것마다 모두 헛발질의 연속이다.
해운이 몰락하니 불똥은 부산항으로 튀고 있다. 고부가가치 환적화물이 50만개 이상 줄 거라는 예상도 나왔다. 이래저래 부산항 주변의 올겨울은 아주 추울 것 같다.
해양수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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