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생활 10일째. 이 도시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일상 곳곳에 스민 기부의 흔적이다.

극장탐방 장소 중 하나였던 맨해튼 1번 애비뉴에 위치한 극장, 씨어터 포 더 뉴 시티(이하 TNC)는 기부와 후원,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되었고 현재도 그 가치를 지켜가며 운영되고 있다.

극장 입구는 문부터 벽 간판까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 금방 눈에 띄었지만 입구가 작아서 언뜻 보면 사무실 건물 같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7m 높이의 천장이 시야를 확 트이게 해서 극장에 어울리는 구조임이 틀림없었다. 원래 육류가공 공장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공간 구석구석이 다양한 미적 분위기를 풍겼는데 무엇보다도 TNC를 사랑하는 작가들이 기부한 그림들의 덕이 크다.

TNC의 대표일꾼인 에밀리는 왜소증의 장애인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당찬 목소리와 자신의 일터에 대한 다부진 자부심으로 극장을 소개했다. 극장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명패에는 극장을 지을 때부터 지금까지 후원하고 있는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객석 의자에도 기부자의 이름을 깨알같이 새겼다. 공연에 사용되는 기계설비, 각층의 문들, 계단 한 칸 한 칸, 복도의 조명들, 난간의 손잡이와 화장실의 크고 작은 소품들까지도 기부자들의 각별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극장은 이러한 역사와 설립취지를 받들어 뉴욕 브로드웨이의 비싼 대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난한 공연예술가와 단체들을 지원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정기적인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업적이면서도 경직된 브로드웨이 극장의 이미지와 상반된 TNC의 따뜻하고 친근한 모토는 그 이름처럼 새로운 도시를 위한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극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후원자를 설득하고 기부금을 모아 극장을 설립한 크리스털은 80에 가까운 할머니지만 헬렌 켈러를 연기했던 지난 시절을 얘기할 때는 영락없는 소녀였고, 그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는 여배우로서의 우아함을 풍겼으며, 13시간의 시차가 있는 나라에서 온 방문객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상냥한 여주인이기도 했다. 에밀리의 설명에 따르면 TNC의 기부자들과 함께 크리스털 역시 그녀 자신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극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직원들 또한 크리스털이 걸어왔던 길을 따르며 TNC의 의미를 지켜가고자 했다. TNC를 운영하는 직원은 통틀어 5명도 채 안 되는데, 규모에 비해 너무 적은 인원이라 매우 놀랐다. 관리해야 하는 공간만 7,8개인데 그 인원으로 가능할까 궁금했다.

에밀리는 바로 그것이 TNC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서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던 존을 소개했다. 평범한 청소부인 줄 알았던 그는 TNC의 자원봉사시스템에 등록된 예술가로 매주 봉사활동을 위해 극장을 찾는다. 그러고 보니 무대 작업을 돕고 있는 한 무리의 청년도, 리허설 중인 공연 팀을 돕는 나이 지긋한 스태프도, 입구에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젊은 여자들도 모두 자원봉사자였다. 돈과 현물 등의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 재능을 기부한 봉사자, 후원자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TNC가 그 사랑을 뉴욕의 시민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그런 면에서는 아마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부산 몇몇 극장에서도 후원자의 이름을 객석에 새겨 넣는 이벤트 아닌 이벤트를 했었다. 그때는 공연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그 명패가 후원자의 허영이라고 생각했다. 기부나 후원을 그저 돈 많은 사람들이 부리는 여유, 유희로 치부하며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는 신성한 장소를 돈으로 사고판다는 생각에 심지어 분개하기도 했었다. 기부문화에 익숙지 않은 탓이라고 변명해보려 해도 TNC에서의 느낀 그 맑은 기운을 생각하면 예술가랍시고 세상에 그저 냉소만 쏟아낸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탐방이 끝나고 며칠 후, 공연에 쓸 의자와 탁자가 필요해 발을 동동 굴렀더니 해외 코디네이터가 옳다구나 무릎을 치며 TNC로 데려다주었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직접 보지 못했던 세트 보관창고로 내려갔더니 공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공연 팀들이 기부한 세트와 소품들이었다. 세트와 소품과 의상을 기부한다니,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마침 작품에 어울리는 의자와 탁자도 건지는 동시에 TNC에 재능 기부할 기회도 얻었다. 체류 기간이 며칠 안 남았지만 드디어 이번 주, 그 아름다운 기부에 동참할 예정이다.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