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남미의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다. 3선 대통령인 그는 자유로운 복장으로도 유명하다. 2006년 취임식 전에 이뤄진 8개국 순방 때 스웨터 차림으로 각국 정상을 만나 구설에 올랐다. 서방 언론은 "외교 관례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이라며 불편한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모랄레스 대통령은 그 스웨터가 볼리비아에서 자라는 알파카라는 동물의 털로 만든 고유 의상이기 때문에 결례가 되지 않는다며 태연해했다. 일부에서는 모랄레스가 선명성 강조를 위해 서구 중심의 '드레스 코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드레스 코드와 관련한 유명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2003년 재·보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유시민 전 의원은 정장이 아니라 흰색에 가까운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나타났다. "국회는 일하는 곳이어서 일하기 편한 차림으로 왔다"다는 것이 유 전 의원의 설명이었으나 당시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회의 엄숙함을 훼손했다는 점을 문제삼아 집단 퇴장을 해버렸다. 유 전 의원 등 당선인 3명은 이 때문에 국회의원 선서를 다음 날로 미뤄야 했다.

특정 모임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함을 뜻하는 드레스 코드는 강제성을 띠지는 않는다. 다만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오래된 관행이기 때문에 대개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드레스 코드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행사는 각종 영화제다. 팬들은 개막식 때 배우들이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에 큰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유명 영화제 조직위 측은 대개 배우들이 입어야 할 의상을 암묵적으로 정해놓는다. 칸영화제 같은 경우는 여배우들이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레드카펫을 밟도록 하는 것을 사실상 의무화해 놓고 있다. 물론 이런 규정에 반발하는 이도 적지 않다. 줄리아 로버츠는 올해 열린 칸영화제 개막식 때 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등장해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칸영화제에 버금가는 부산국제영화제(BIFF)도 늘 여배우들의 화려한 드레스 경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 6일 열린 개막식에도 팬들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올해 BIFF의 드레스 코드는 '블랙'이 대세를 이뤘다. 강수연 BIFF 집행위원장 등 관계자와 남녀 배우 상당수가 검은색 옷을 입었다. 태풍 '차바'의 내습으로 부울경 지역이 큰 피해를 입은 마당에 마냥 웃고 즐길 수만은 없다는 현실이 화려한 의상을 자제한 배경일 듯하다. 팬들로서는 아쉬울 터지만 내심 고개도 끄덕여진다. 어찌보면 '참 개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염창현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