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서 지난 12일 발생한 규모 5.8 지진은 한반도 지진시대를 알리는 적색경보다. 관측 사상 역대 최대 규모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진은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지진에 속수무책 상태인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겪고도 정부의 긴급재난 대비 태세는 낙제점이었다. 진앙 수정과 늑장 발송된 긴급재난 문자 메시지가 단적인 예다. 우리나라는 지진에 취약한 고층 건물과 아파트, 다중이용시설, 교량, 저수지가 혀를 내두를 만큼 많다.

지진 대응 매뉴얼도, 긴급사태 골든타임도, 사후 대책도 맹탕인 '삼무(三無) 정부'에 실망해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나선 일부 시민이 생존 배낭을 장만하기에 이르렀다. '아킬레스건인 양산단층대를 건드렸으니 더 강력한 지진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재화하고 있다.

경주 지진은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증폭되고 있다. 경주 지진 진앙은 월전 원전 6기, 고리·신고리 원전 10기 등 모두 16기의 원전이 들어서는 원전밭과 지척이다. 특히 고리·신고리 원전은 단일 지역으로 세계 최대·최다 규모다. 이곳에 지진 발생 가능성이 있는 거대한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니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없다. 규모 6.5~7.0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를 했다는 정부 설명이 무색하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사가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바뀌고 있다.

후쿠시마 참사는 오만과 오판의 산물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은 중대 사고가 1억 년에 한 번 날만큼 안전하다고 장담했다. 규모 9.0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고, 이중 삼중의 전력원과 웬만한 쓰나미엔 끄떡없는 해안 방역을 갖췄다는 이유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은 규모 9.0의 지진과 해안 방역보다 배가량 높은 쓰나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2012년 7월 일본 국회사고조사위원회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재해'라고 결론 내렸다.

이미 2007년 한 국제회의에서 후쿠시마 원전에 13m 이상의 대형 쓰나미가 올 확률이 0.1%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도쿄전력은 이를 무시했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를 초래했다. 반면 인근 도호쿠전력 오나가와 원전은 높이 15m 방벽을 확보해 참사를 피했다. '오만과 오판', 그리고 '0.1%의 가능성' 대비의 결과는 천양지차다.

'꿈의 에너지'라는 원전의 이면은 이처럼 '희생'과 '차별'이다. 동일본 대지진 때문에 여전히 피난 생활을 하는 사람이 17만4000여 명에 이른다. 방사능 유출 후폭풍을 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나라 원전은 부산 울산 경북 전남에 집중돼 있다. 신고리 원전 30㎞ 안에 부산 울산 경남 주민 380만 명이 살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30㎞ 내에 살던 주민들이 강제 이주로 삶의 뿌리가 뽑혔다.

경주 지진은 이를 되새기며 또 하나의 베일을 벗기고 있다.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 정책에 깔린 배제와 은폐 문제다. 최상위 국가 에너지 전략인 에너지기본계획과 이를 근간으로 한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입안하면서 원전밭을 끼고 사는 부산 울산 경남 주민의 뜻을 제대로 수렴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원전이 안전하지도, 운용 비용이 싸지도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원전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업, 관료, 학자들 이 있기 때문'이라는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지적은 유효하다. 그는 후쿠시마 참사 수습을 지휘했다.

후쿠시마 참사 이후 세계 원전 정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독일은 원전을 접었다. 각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원전 17기 전부를 2022년까지 폐쇄하라는 건의안을 만들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위기가 기회'라며 원전 확대 정책을 펴고 있다. 원전 5대 강국의 입지를 발판으로 원전 수출과 원전 증설을 꾀했다. 신고리 5·6호기 증설이 그 산물이다.

정부는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원전 안전을 설득해야 한다. 자동차 부품이 3만 개라면, 원전은 250만 개 부품으로 이뤄진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고가 날지 장담할 수 없다. 노후 원전에 쏠리는 우려가 더 커지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그 원전의 터가 불안하다. 그러니 폐로가 결정된 고리1호기와 2022년까지 재가동하기로 한 월성1호기 가동을 당장 멈추고 폐로를 전제로 한 안전점검을 하는 게 첫째다. 지진재해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 신고리5·6호기 건설 재검토와 함께 기존 원전의 철저한 안전점검이 이뤄져야 함을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과정에서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고 주민이 원전 미래 결정에 참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자서전에 '원전이 안전하다는 말을 신처럼 믿었으나 그게 아니었다'고 실토했다. '전 시스템이 아첨과 굴종, 지도자들의 파벌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상도 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