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부는 조선 후기 학자다. 예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이옥이 당쟁에 휘말려 유배지로 떠돌자 이만부는 "학문을 배워 도학을 밝히겠다"며 벼슬길을 포기한다. 그가 당파와 학통을 초월해 학문의 일가를 이뤘음은 물론이다. 그가 남긴 '부끄러움을 닦는 법'은 98자의 짧은 글인데 부끄러울 치(恥) 자가 무려 35번이나 나온다.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그 때문에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하략·정민 역)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다. 특히 칼과 저울을 들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사와 검사의 끝없는 타락상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홍만표 전 검사장과 최유정 전 부장판사부터 진경준 검사장, 김수천 부장판사, 김형준 부장검사까지 전·현직 판검사들의 비리 행태는 법률 청부업자나 사법 거간꾼에 가깝다. 그들의 손에 들린 칼은 정의의 칼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도구였고, 편평해야 할 저울추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오래전 법조인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조인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사도법관' 김홍섭, '검찰의 양심' 최대교 고검장이 꼽혔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 부른다. 오늘 부끄러운 법조계의 몰골을 보며 그들이 새삼 그립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가 없어 방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가인(街人)이란 아호를 직접 붙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그는 해방이 됐어도 분단이 되자 '거리의 사람'이란 처지는 변함이 없다며 호를 그대로 썼다. 그는 사법부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자 법조인의 사표였다. 이승만 정권의 끊임없는 사법부 견제에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경무대에 올라간 법무부 장관에게 이 대통령이 "요즘 '헌법' 잘 계시느냐"고 물었다는 일화는 양자 간의 긴장 관계를 잘 말해준다. 가인이 '헌법'을 내세우며 원칙을 고수하고 비판한 데 대한 못마땅한 심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인은 공사 구분이 엄격했다. 6·25전쟁 당시 부산 피란길에 "집사람을 관용차에 태우고 다닐 수 없다"며 부인을 담양의 친정집에 내려보냈다. 부인은 그곳에서 공비에게 학살됐다. 간혹 친척이 찾아와 재판 얘기를 꺼내면 "대법원장이 둘이냐"고 호통을 쳐 입을 막아버렸다. "나는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정년 퇴임하면서 이임사로 남긴 말이다.

김홍섭 판사 앞에 붙는 수식어는 청렴하고 맑은 성품과 고뇌하는 그의 모습에 딱 들어맞는다. 장면 총리가 붙여 준 '사도(使徒)법관'에서 '사형수의 대부', '법의(法衣)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판사'까지. 그는 항상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실정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한 뒤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박봉을 쪼개 그들을 돌보고 묘지를 사는 데 보탰다.

그는 청빈이 몸에 뱄다. 1950, 60년대 최빈국의 가난한 시대라 해도 판사라는 지위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특권과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들인 군 작업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출퇴근했다. 가끔 격식 차리는 자리에 입고 온 중고 양복도 장인인 낭산 김준연(전 법무부 장관)의 옷을 줄인 것이었다. 점심은 무짠지 한 가지 반찬에 밥을 싼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혼자 먹었다.

최대교 서울고검장은 '대쪽 검사'의 상징이다. 그는 권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에 맞서 검찰 중립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백범 김구 암살사건 때 담당 검사장인 그 몰래 경무대의 지침에 따라 검찰총장이 직접 영장을 청구하자 사표로 맞섰다. '이승만의 양녀'로 불린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 사건 때도 대통령과 법무장관, 검찰총장 등의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 권한이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고 한 뒤 전격 기소해 버렸다. 그는 결국 이 일로 옷을 벗었다.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다." 도시락을 쌀 형편이 못 돼 점심때면 문을 잠가놓고 밥 대신 누룽지를 먹었다. 기자들에게 들킨 뒤 그는 '누룽지 검사장'이란 별명이 생겼다. 그는 '냉수도 헹궈 마시는 사람'으로 통했다. 이웃집에서 담 너머로 건넨 돌떡도 돌려보냈다. 시골에서 동생이 씨암탉을 들고 오자 "속 모르는 남들이 보면 검사장에게 뇌물 바치는 줄로 알지 않겠느냐"고 꾸중할 정도였다. 중년 이후에도 서울 변두리 20여 평 낡은 한옥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두어 평 되는 변호사 사무실에는 흔한 에어컨 조차 없었다. 위당 정인보는 그의 염결하고 강직한 기개를 가을 강(秋水)에 비유하며 시로 기렸다.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 강과 다르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