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를 간단히 설명해 주는 '국력의 방정식'이란 것이 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미국의 조지타운대 레이 클레이 교수는 1975년 '각국의 세력 추세와 198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내놨다. 국력={기본요소(인구, 영토)+경제력+군사력}x(국가전략+국민의지). 이 방정식은 국력 평가에서 유형 외 국가전략과 국민의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고 경제·군사력이란 유형의 국력이 크더라도 국가전략과 같은 무형의 국력이 형편없다면 총체적인 국력은 크게 약화될 수 있다.
국가전략은 성장 모멘텀을 국가목표로 설정하는 작업이며, 국민의지는 국민 모두가 단합된 마음으로 목표를 추구하는 자세다. 목표를 뚜렷이 하고 일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 체계가 잘 작동하며, 경제적 약자에게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의 부(富)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잘살려면 국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뚜렷해야 한다. 국력 신장에는 국방력 외교력 등의 신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심은 경제발전 의지일 것이다. 국력 방정식은 영국에도 잘 적용될 것이다. 면적상 세계 80위 수준으로 한반도보다 약간 큰 국토와 세계 22위인 64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섬나라 영국은 면적 인구 자원 등 기본요소에 많은 제약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세계 5대 경제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준 높은 국가전략과 국민의지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국가전략을 세우고 국민의지를 집약시키는 것은 국가의 리더십이요 정치력이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의 종주국답게 오랜 기간 탄탄한 정치력으로 작은 나라 영국을 강국으로 만들어왔다. 20세기 이후 영국은 전쟁과 몇 차례 경제부진을 겪었지만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새로운 발전전략을 세우고 민의를 집약시켜 국가발전을 지속해 온 것이다. 정치권은 양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보장제를 정비했고, 대처리즘으로 금융·노동시장 개혁을 강력하게 이끌어왔으며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을 택하는 등 시대 상황에 맞춰 국가전략을 선도해 왔다.
그런데 근래 영국의 정치력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행 선거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정치인들은 국가전략보다 포퓰리즘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일련의 선거는 이런 문제들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4년 5월, 투표율에 의해 의석을 배분하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연합(EU) 탈퇴를 기치로 내건 영국독립당(UKIP)은 27.5%의 득표율로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전국적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이민 등 EU정책에 대한 불만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영국 총선의 결과는 달랐다. 650명 하원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보수당은 331석으로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는 완승을 했으며, 노동당은 232석을 차지했다. 총선은 유럽의회 선거와 달리 선거구별로 최다득표를 한 후보를 선출한다. 비례대표도 없이 승자독식구조이다 보니 영국독립당 후보들은 총투표수의 12.6%인 388만 표를 얻고도 의석수는 1석에 불과했다. 여기에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는 총선 승리를 위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찬반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 23일 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번 국민투표는 국가 전체의 득실보다 이민, 난민 증가에 따른 불만에 집중된 결과, 51.89%의 유권자가 EU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브렉시트는 이제 영국의 새로운 국가목표가 됐다. 그런데 이런 선택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만약 브렉시트 안건을 의회에 올려 논의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또 총선에서처럼 전체 정치 경제 사회 이슈 속에서 논의되었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표출됐음에도 총선 결과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회가 민의를 수렴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도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브렉시트는 세계 경제에 충격을 가져왔다. 우리는 이 경제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며, 차제에 영국의 이런 사례를 국력 방정식의 관점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선거와 국정운영에 민의가 잘 반영되는지 살펴봐야 하며, 정치적 리더십은 선거 승리를 위한 포퓰리즘이 아니라 국력신장을 위한 국가전략과 국민의지를 모으는데 발휘되어야 한다.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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