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상반기 최고의 문화 텍스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드라마 '시그널'을 꼽겠다. '시그널'은 16부작 종편 드라마로, 대단한 문학 작품이나 스펙타클한 영화 텍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영상과 편집,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와 메시지는 가히 압도적이다. 김은희 극본·김원석 연출의 TV드라마 '시그널'은 힘겹고 어두운 '유괴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비가 오는 학교 현관 앞에 우산 없이 서 있다. 주인공 박해영은 같은 반 친구인 김윤정에게 우산을 같이 쓰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낡은 우산이 부끄러워서 이내 그녀를 지나치고 만다. 그리곤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김윤정은 빨간 구두를 신은 여성을 따라가는데,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렇게, 박해영은 '김윤정 유괴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 하지만 경찰은 제대로 된 단서를 찾지 못하고, 엉뚱하게 또 다른 남성 피해자를 범인으로 특정한다. 박해영은 용기를 내 경찰서를 찾아가서 "범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예요"라고 호소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무감각하게 흘러 '김윤정 유괴사건'은 모두에게서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사건의 진실이 완전히 묻혀버릴 것 같은 그 순간에, 과거로부터 알 수 없는 신호(Signal)가 도착한다. '김윤정 유괴사건'의 공소시효 만료 3일 전, 경찰이 된 박해영(이제훈 분)이 '경찰서 폐기물' 더미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의 '무전 신호'를 수신하게 된 것이다. 15년 동안 홀로 재수사 요청 피켓('제 아이를 죽인 범인을 잡아주세요')을 들고 있던 소녀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이 '김윤정의 죽음'을 잊어가고 있던 그때 말이다. 이 드라마의 시공간 구성과 서사 구조는 이 지점부터 복잡하게 뒤얽히기 시작한다. 이제 '시그널'의 극중 시간은 순차적인 흐름에 따라 단순히 누적되지 않고, 다양한 인과적 사건과 관계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재편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극중 인물과 시청자의 '망각'을 심문한다.
이재한 형사의 '무전'이 계기가 돼 박해영은 '김윤정 유괴사건'의 공소시효 종료 이틀 전,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남성의 백골사체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극중 악인인 김범주(장현성 분) 수사과장은 "미제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은 경찰의 치부"가 될 것이라며 경찰청 차원에서 이 사건을 종결하고자 한다. '김윤정 유괴사건'이 다시 은폐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박해영은 사건 담당 형사인 차수현(김혜수 분)에게 따져 묻는다. "당신도 다른 형사들처럼 못 들은 걸로 할 건가요?" 여기에 차수현은 "아니, 잡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차 형사는 박해영과 협력해 15년 전 유괴사건의 진짜 범인을 체포한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박해영 차수현 등은 경찰청 '장기미제 전담팀'을 꾸리게 되고(실제로는 '좌천') 과거에 발생한 '미제 사건(들)'을 재수사해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그러나 '시그널'의 진정한 미덕은,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미제 사건'과 그것의 드라마틱한 해결 과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장기미제 사건의 뿌리에 우리 사회의 속악한 욕망과 현실 권력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시그널'은 16화에서 핵심 사건(인주 여고생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해피엔딩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과 은폐된 사회 부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배터리가 방전된 낡은 무전기에서 울리는 '시그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는 그저 드라마틱한 구성을 위해 직조된 비현실적인 상상의 산물일 뿐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망각'의 심연 속에서 '진실'의 가치를 인양하고자 하는 이재한 형사의 분투와 신호(시그널)란, 가치중립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는 폐차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는 '사회 변혁의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시그널'을 근래 보기 드문 수작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망각하고 있는 '은폐된 진실'을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임무' 역시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이재한 형사는 잘못된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절대적인 시간 관념(과거)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노력 여부에 따라 과거와 관계 맺고 있는 현재적 시간(현실)이 혁신될 수 있음을 함의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우리에게 '변혁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는 바뀔 수 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라고 말이다. 드라마는 끝났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분명 '다시 무전이 시작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과거의 무전을 수신할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치, 치지, 치직….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