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배지에 '나라 국(國)'자를 쓰던 시절의 일이다. 여의도 국회를 방문한 독일의 헌법학자가 의원들의 양복 깃에 붙어 있는 배지를 보고 무엇이라 써 있느냐고 물었다. '나라 국'이라고 설명하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라 국을 쓰는 것은 잘못이다. 쓴다면 '백성 민(民)'을 써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의회라면 권위와 권력의 상징인 국가라는 용어보다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을 위해 일한다는 '민' 자를 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통일 이후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우리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베를린 의사당 건물을 벤치마킹했다고 할 정도로 기다란 직육면체 건물 가운데 천장 위에 돔이 얹혀 있는 형태가 유사했다. 재건축을 담당한 건축가는 이 건물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설계에 착수했다. 건축가는 베를린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있는 전망 좋은 의사당 건물 옥상을 시민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앙의 커다란 돔을 유리로 바꾸고 돔을 따라 계단을 만들어 시민들이 걸어 올라갈 수 있도록 꾸몄다. 가운데 돔 밑에는 국정을 논의하는 본회의장이 놓여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유리 돔 안에 들어서면 의원들이 국정을 논하는 모습을 자신의 발밑으로 내려다 볼 수 있다.

총선이 끝나고 이달 말부터 20대 국회가 시작된다. 선거기간 중 유권자들을 찾아다닌 의원들도 여의도에 등원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면에 설치된 어마어마한 계단이 끝나면 정문 출입구가 있다. 이 문은 금배지를 단 의원들만 출입할 수 있다. 국민들은 큰 건물을 돌아서 뒷문으로만 출입하게 되어 있다. 차량 접근도 마찬가지다. 정문 앞은 의원들 차량만 세울 수 있다. 뒷문 근처 주자창의 경우도 언제부터인지 일반 민원인들의 차량은 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민초들은 한강 둔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 길을 걸어와야 한다.

의사당 앞 의원회관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뒷문 출입만 가능할 뿐이다. 국회 건물에 들어서면 '국민이 주인이다'란 말은 구호일뿐, 국민은 그저 하찮은 민원인에 불과하다. 국회가 열려 국회 안에 들어가면 의원들과 국회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일반인을 위한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복도 한편에 놓인 몇 개의 소파가 이들을 위한 최대의 배려일 뿐이다. 국회가 여의도에 처음 위치할 때부터 국민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한 데다 근래 세워진 지하철역 또한 걸어서 한참 걸리는 곳에 있다. 우리의 국회는 오직 의원들만을 위한 장소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행정부도 뒤지지 않는다. 과거 과천청사 시절 기획재정부와 법무부가 있었던 과천청사 1동은 권위의 상징처럼 청사 내 가장 안쪽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 위까지 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공무원뿐이다. 그것도 정문 앞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장·차관 차량 정도이다. 나머지 공무원은 뒷문 쪽에 내려야 했다. 공무원은 그나마 다행이고 일반 국민은 멀리 떨어진 민원인 주차장에서 내린 뒤 높은 언덕까지 걸어와야 했다. 2000년대 이후 건립된 정부 세종청사도 탈권위를 내세웠지만 민원인에 대한 배려는 여전히 미흡하다. 용의 형상을 했다는 세종청사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멀다. 당초 이 건물과 건물 사이 옥상을 정원으로 연결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보안을 이유로 시민들의 접근이 막혀 있다.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일본 관청은 2차대전 패전 이후 완전히 탈바꿈했다. 오래된 재무성 건물 안쪽에는 주차장이 있지만 공무원 차량 주차는 금지시키고 있다. 국민이 우선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주차장소부터 민원인을 위해 항상 비워두고 있는 것이다. 정부 청사는 민원인의 접근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지하철 연결이 잘되는 교통중심지에 배치했다. 경제산업성 건물은 아예 지하철 승강장에서 청사로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지하통로를 조성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이러한 주권재민을 상징하는 국회라면 국민을 홀대해선 안 된다. 지금 세계는 경제 격변기를 맞고 있다. 올해 다보스 포럼은 네트워크의 지능화를 통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비가 절실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 해운·조선 등 전통산업의 구조조정으로 혹독한 경제적 시련이 예고되고 있다. 어느 때보다 국민의 관심이 국회에 쏠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20대 국회는 진정 국민을 위한 민의의 전당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IR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