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도 한풀 꺾여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뜨거운 태양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맹렬하게 내리쬐었지만, 결국 계절의 변화 앞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진다. 우리의 일상에도 끝내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까. 이렇게 염원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트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동안 북한과 대치가 빚었던 극도의 긴장상태는 우리가 여전히 휴전 국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고, 그 공포가 얼마나 거대한지 실감하게 했다. 세월호 참사는 발생한 지 무려 500일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았고, 심지어 실종자 9명이 아직도 바닷속에 잠겨 있다.

국립공원위원회는 설악산 오색지구에서 대청봉이 지척인 끝청에 이르는 오색 케이블카 설치를 온종일 걸린 심의 끝에 결국 허가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는 수천수만 년이 넘는 시간을 지속해온 생태계보다 관광객을 유치해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이 우위를 점하는 사회이다. 이뿐만이겠는가. 뉴스만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여름 내내 내리쬐는 태양보다, 습하고 지치는 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우리 사회의 모습들이다.

원하지 않는 일들을 이렇게 마주할 때면 분노의 감정이 우선 든다. 그런데 그 분노를 일으킨 대상에게 비판과 개선의 목소리가 전혀 전달되지 않을 때, 심지어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잦아지면 그 분노는 어느새 무기력함과 좌절로 변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고,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 순간들의 축적에서 또 다른 동력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 우리 사회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정녕 이것이 다수의 바람인가?

이렇게 착잡하고 씁쓸한 소식들만 접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편에서 편해지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을 빨리 무장해제시키고 흡수통일해 버리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는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문제도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이나 미래 세대에 대한 생각 말고 지금의 이익이나 챙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편에 서면 참으로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6세기 프랑스 재판관이자 철학자였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이러한 상태가 '자발적 복종'의 시작이라 말한다. 세상의 모순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힘이 센 한 두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에 저항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의 망각'으로 인해 일어난다. 단순히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다,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고 싶고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지나치게 맹목적인 경쟁 사회를 견디는 것도, '갑을 관계'를 비판은 하지만 전복하지 못하고 수긍하는 것도, "나만 잘되면 된다"는 믿음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하거나 공적인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도 모두 그로 인해 빚어진 현상이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이렇게 나약해진 마음에 소리친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 행복할까? 그렇게 사는 것을 과연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까? 그런 삶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또 있을까?"('자발적 복종') 그렇다. 이 부조리하고 어려운 시절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평화를 염원하고 지키는 일이 어렵고 고단하지만 그를 등지는 일은 더 어렵고, 세월호를 잊기란 잊지 않기보다 더 어렵다. 설악산 케이블카가 얼마나 많은 관광수입을 창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자연은 지금 지키지 못하면 영원히 지킬 수 없기에 모른 척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외면한다면 결국 나의 삶은 더욱 원하지 않는 선택들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왜 사회의 부조리함에 문제를 제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길 염원하는가. 그것은 인간답게, 고귀하게,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는 부정의 한 기준에 맞추기보다 새 가능성을 창조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자유란,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때론 덧없게 느껴지기도, 힘에 부치기도, 외롭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옳은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인디고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