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도입부의 한 문장이다. 4월 16일이라는 날짜가 괜스레 마음에 밟힌다. 카뮈는 전염병이 창궐해 고립된 도시에서 인간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페스트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세균에 의한 전염병은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유럽인의 무기가 아니라 그들이 옮긴 병균으로 신대륙 원주민 수천만 명이 죽었다. 여기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균쇠'가 탄생한다. 이런 세균의 재앙을 멈춘 것은 항생제, 즉 과학기술이었다.
세균은 세포의 형태를 갖는 작은 생물이지만, 바이러스는 DNA나 RNA로만 이뤄진 번식기계다. 세균이 사람이라면 바이러스는 생식기인 셈이다. 따라서 바이러스에는 항생제도 무용지물이다. 살아 있어야 죽일 것 아닌가? 바이러스는 인체에 침투, 인체내부 자원을 이용해 증식한다. 감염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페스트는 쥐벼룩이 감염을 매개한다. 따라서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은 초기대응이 중요하다. 최초 감염자를 완전 격리할 수만 있다면, 더는 환자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한 명을 놓치는 순간 환자는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게 된다.
빠른 초기대응이 쉽지만은 않다. 메르스는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증세가 독감과 비슷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요양급여명세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급성 비인두염(감기) 환자 수는 500만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있을지 모를 메르스 환자를 상시 대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 첫 번째 국내 메르스 환자의 경우도 감기인 줄 알고 여러 병원을 다니다가 대규모 감염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의 대책은 무엇일까?
TV를 켜려고 매뉴얼을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완강기를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보아야 한다. 집에 자주 화재가 나는 사람은 완강기 사용법을 외우고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불이 났는데 완강기를 들여다보며 사용법을 연구할 시간은 없다. 빠른 초기대응이 중요하지만, 자주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읽고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완벽한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도 질병관리본부의 매뉴얼은 있었다. 첫 번째 메르스 확진자는 UAE, 사우디를 여행한 후 바레인을 거쳐 입국했다. 사우디는 메르스 발병국이지만, 바레인은 아니다. 매뉴얼에서는 입국 전 최종 방문국만 문제 삼기 때문에 이 환자를 놓친 것이다. 메르스를 의심한 병원에서 검사를 요청했을 때에도 매뉴얼에 따라 질병관리본부가 검사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기 시의 매뉴얼은 완벽해야 한다. 어차피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기에 지나치게 완벽해도 좋다.
사실 매뉴얼은 이론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일어날 일들을 미리 가상으로 예상해 만든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세월호와 같은 사고에서 선장 이하 승무원들이 배를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매뉴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현장의 상황판단에 따른 신속하고 융통성 있는 결정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라 불린 롬멜은 88㎜ 대공포로 전차를 공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대공포는 비행기를 쏘라고 만든 것이지만, 오히려 전차를 부수는 데도 뛰어났던 것이다.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평상 시 담당부서의 몫이라면, 위기 발생 때 현장의 빠른 결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최고 책임자의 몫이다. 현장 전문가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위기관리 매뉴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장의 빠른 판단도 없었고, 권한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사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탄저균이 유출되었을 때의 매뉴얼은 있는지,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한 매뉴얼은 있는지, 이런 매뉴얼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정말 제대로 된 것인지. 안타까운 결론이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직접 자신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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