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어찌 이리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첫사랑처럼 시즌에 꼭 맞춰 돌아오는 그림 같은 것일까. 오랫동안 머무르던 기억이 남기고 간 흔적에 오늘의 그림을 끼워 맞춘다. 기억을 끄집어낸다. 줄에서 줄로 이어져 펼쳐지는 경쟁의 레이스에 혼자 던져졌다는 사실에 갈 곳 몰라 하던, 지금까지를 통틀어 참으로 지난하고도 혹독한 형벌의 한때가 있었다. 기대어 서 있을 데라곤 자신의 끈기와 내가 믿는 절대자뿐인 그 절벽 끝에 서 있을 때였다.

이태 전 이맘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해 세상 빛이 감청색 같다는 생각에 극단의 길을 가고 있었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가치관의 빈사상태, 흔들리는 정체성 때문에 혼돈의 길을 가고 있을 당시, 빈 그루터기에서 나는 바람소리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걷는다는 생각조차 잃어버리고 걸었다. 한꺼번에 느끼고 말하면서 어느 한 부분을 포기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단정하고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대상은 불완전하고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더 경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잊고 있었다.

'지금'을 믿지 못하고 '여기'에 있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립이었다고 해야 할까. 혼자 있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이 아닌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의 고독은 잔인했다. 그것은 어쩜 텅 빈 목소리 같아서 소리 없는 비명이나 울부짖음 같은 것이었다. 슬픔은 그냥 슬픔이라는 말일 뿐, 모든 사람들이 이 쓸쓸한 언어에 아무 감정 없이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슬픔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를 때 슬럼프가 왔다. 이렇듯 슬픔이란 말은 개인의 감정이고 추상이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만 매몰된 채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슬펐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공감하는 것과 소통하는 것에 표피적이면서 서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같은 생각과 같은 고민으로 진정한 의미를 찾으러 맘 맞는 사람들과 연출되지 않은 술자리를 원한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 그때, 모처럼 동료들과 선배 문인들과 동래에 있는 곱창집에서 우리들만의 커뮤니티에 발을 담그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임을 느끼던 날이었다. 조금은 고무되어 집으로 향하는 전철을 기다리며 한 선배에게 내가 처해 있는 심경을 잠깐의 시간을 빌려 토로하고 있었다. 자못 얼굴이 어두웠으리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상에 흔들리는 나의 어깨를 선배는 감싸고 토닥여 주었다.

어깨를 두드려준다는 것은 온몸으로 하는 길고 긴 연민과 침묵의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이라 하지 않던가. 그 선배가 바로 이청득심(以聽得心)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내 마음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선배의 옆모습이 타인들에게 순연하게 내비쳤던 것일까. 아니면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는 연인들처럼 남루해 보였던 것일까. 모르는 회사의 유니폼 같은 조금은 낡은 외투를 걸친 그야말로 필부의 모습을 한,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 한 분이 자판기에서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뽑아서 나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선배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인 것일까. 순간 너무 놀라 당황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제스처를 보였다. 아니라는 눈빛으로 커피를 건네주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말이 범람하고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우리들 앞에, 말없이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커피를 건네는 당신은 어떤 고독에, 어떤 슬픔에, 어떤 토닥거림에, 어떤 목소리에, 어떤 눈빛에….

그 자신도 분명 감동했던 순간이 있었으리라. 아마 그럴 거라고 나는 확연했다. 핸드드립, 블랙커피만을 고집하던 나는 얼떨결에 양손 가득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믹스커피를 받아들었다. 따뜻했다. 미처 고맙다는 인사말도 건네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선배는 나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참 보기 좋은 순간의 넉넉함이었다. 역시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이 험난하고 강퍅하고 인정 없는 세상에서 그 필부의 소리 없음이 주는 그 이타적인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 침묵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 풍경이 다른 풍경으로, 한 사람의 말없음이 다른 감정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사소한 행복'을 경험케 했다. 전동차가 전역을 출발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선배와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먼저 말없이 떠나가는 그 분의 뒷모습에 시선이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진정 멀어가는 뒷모습에서 실존적인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과연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우주의 한 공간이며, 우리는 반드시 모든 감정을 동원해서 이 세상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