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접어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신발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운동회 때면 어머니를 졸라 겨우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집 벽장에 넣어두고 운동회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일, 방목한 소를 찾아 산을 헤매다가 산 지 얼마 안 된 새 고무신이 찢겨져서 울곤 했던 일, 고등학교 시절 워커라는 군용구두를 구입해서 사철 신고 다녔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 세대는 급속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신발에 대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농업중심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바뀌면서 짚신, 고무신, 운동화, 구두, 기능화 등의 신발들이 1세기는커녕 50년 사이에 급속히 바뀌어 갔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과거회상의 흑백필름을 돌려보면 신산한 생의 의미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고 한 생 심심치 않게 해준 그 경험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도 된다.
사람들의 직능이나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단어로 흔히 모자나 의자를 곧잘 사용하지만 나는 신발을 먼저 생각한다. 모자나 의자는 훨씬 권위적이고 관념적이지만 신발은 체화된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여 보행과 노동의 능률을 높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발산업은 발달해왔다. 이제 형태에 따라, 재료에 따라,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신발이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용도에 따른 신발의 종류를 열거해도 운동화, 러닝화, 보행화, 실내화, 학생화, 아동화, 등산화, 캐주얼화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신발은 그것을 신은 사람의 역사를 만든다. 그래서 이력서라는 단어는 신발을 신고 걸어온 사람의 역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발의 자국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다양하게 만들어진 신발을 바로 골라 신는 것이 자신의 생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것이다. 따라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선택해야할 신발이 따로 있는 것이다. 어느 건설업자의 섹스파티에 참가한 차관이나, 억대 현금이 발견된 한수원 부장이나, 대로변에서 음란행위를 한 제주지검장이나, 무소불위의 힘으로 초법의 생을 살다 사회적 피해를 남기고 떠난 종교지도자나, 탈세를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외국에 설치한 재벌이나 권력자들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낀다.
10여 년 전 동남아 여행을 가서 당한 황당한 일 중의 하나는 급행료를 내고 입국 전 절차를 간단히 해서 들어올 사람을 먼저 찾는 그 나라 공무원을 보았을 때였다. 이 황당함은 제대로 민주화가 되지 못한 불행한 나라의 촌극으로 넘길 수 있지만 지금도 연출되는 잘못된 우리나라 신발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는 없지 않는가.
신발은 크기도, 재질도, 용도도 다르다. 자기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신발을 탐내어서도 안 되지만 그런 신발을 선택하려 할 때 적절하지 못함을 충고하고 교정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와 유관한 해당 기관, 가정, 학교, 선거, 인사청문회 혹은 임명권자의 사명감과 도덕성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직도 문제는 많다. 가까운 예로 시·도 단체장 선거가 끝나면 산하 기관장이 바뀐다. 직무에 알맞고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을 뽑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전연 관련 없는 사람을 선거 유공자라는 이유로 앉히고야 마는 배짱은 아직도 남아 있다.
신발은 결국 자기에게 맞는 것을 신었을 때 자신의 길을 더 즐겁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즐거움이 자신에게 사명감과 업적을 만들어주고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쓰나미처럼 한국사회를 우울하게 덮고 있는 세월호 사건의 비극을 만든 유병언의 시신 옆에 놓여있던 부끄러운 신발을 바라보며, 엄혹한 세파 속에서 바로 신고 바로 걷는 일의 소중함과 어려움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환상처럼 그려지는 정반대의 두 신발을 다시 기억해 본다. 이멜다와 고흐의 신발이다. 1986년 '피플파워'에 의해 이멜다가 하와이로 쫓겨날 때 필리핀 말라카냥궁 지하의 한 방에서 발견된 최고급 구두는 2200 켤레였다. 그는 신발을 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장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신발과 정반대의 편에 있는 고흐의 신발그림은 내게 그지없이 방황하는 고독한 자의 모습이거나 외롭고 가난한 그의 자화상으로 보였다. 그렇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기대지 않았다면 한 점의 명화도 남기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생전에 그림값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정신이상자였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가야하는 화가의 길을 갔으므로 우리는 그가 남긴 명화를 볼 수 있다. 그의 선택은 그림 속에 놓인 남루한 구두처럼 처절하리만큼 불행한 삶이었지만 우리는 그를 성공한 예술가로 기억하게 된다. 자신에게 맞는 신발을 신고 바로 걸을 일이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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