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가 질질 녹는 한여름에 지인이 결혼을 한단다. 이 더위에 팔짱 끼고 웨딩마치에 맞춰 차곡차곡 행군을 하겠다니 그것참 장하다고 감탄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검색어 순위에 오른 걸 보고 결혼 소식을 알게 된 나는 친히 전화까지 해서 참석해달라는 이 연예인 K양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제 빚진 것 갚을 때가 왔다고 으름장을 놓는 통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무조건 참석하는 걸로 약속해 버린 것이다. 벌써 15년도 지난 그 빚은 학교 다닐 때 빌린 밥값 5000원. 이렇게 무거운 짐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녀가 뜨기 전에 후딱 갚아버리는 건데.

여하튼 타이밍은 이래저래 늦었다. 사실 내 동생 결혼식 빼고는 10년 동안 지인 결혼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초대장은 수없이 받았지만 늘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때를 놓쳤다. 결국엔 나야말로 자격지심으로 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올드미스'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마치 올드미스 여왕에게 왕관을 물려받으러 가는 기분인데, 더 심한 건 이 여왕이 나보다 후배라는 거다.

결혼식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주인공인 신랑 신부가 공연하기로 마음먹으면 스폰서들을 상견례 하고 공연날짜를 정하고 예식장을 예약하고 의상과 소품을 구입하여 홍보 사진을 찍는다. 주례와 사회자와 들러리 등의 조연들을 섭외하고 필요에 따라 연출을 불러 평생에 한 번뿐이길 바라는, 감동적인 예식 연출을 의뢰한다. 한 분 한 분 관객 명단을 작성하고 초대장을 보낸다. 공연에서 흔히 있는 배우들 간의 갈등도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양가 스폰서와의 힘겨루기, 넉넉지 않은 예산, 빡빡한 준비일정으로 스트레스가 뒤따르는 것까지 참말 한편의 작품을 만드는 것과 똑같다.

좋다, 예식장을 향한 '십 년 만의 외출'! 한편의 공연을 보러간다고 생각하고, 새벽부터 하객 패션으로 무장해 서울 예식장행 전세버스에 올랐다. 장장 6시간을 달려 도착한 호텔 예식장. 실내분수는 예고도 없이 물을 뿜어대고, 떨어질 듯 위태롭게 빛나는 샹들리에, 향기 없는 병풍처럼 늘어선 스타들의 화환,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포토존의 기자들까지…. 익숙지 않은 풍경 탓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K양의 광팬인 여동생의 부탁도 있고 해서 '팬질'을 하러 신부대기실을 찾아갔다.

K양과 허물없이 지내던 나는 작품을 핑계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상태였고, 뮤지컬 무대에서 입던 화려한 의상이 낯설지만은 않았는데, 그녀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겹겹이 진을 친 하객들에 밀려 사진은커녕 면사포 꼭대기만 보고 나오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진정되질 않았다.

신부로 변신한 K양이 한 걸음 한 걸음 신랑을 향해 걸어갈 때, 나는 심장이 터질뻔 했다. 두 사람이 직접 쓴 편지를 읽으며 사랑의 맹세를 나눌 때, 양가 부모님께 절을 올릴 때는 나를 비롯해 주변의 여자 하객들이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옛날엔 그 장면에서 왜 눈시울을 붉어지는지 이해가 안 됐다. 마침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자, 예식장 안에 모든 하객은 약속이나 한 듯 기립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연예인이라고서 해서 크게 요란할 것 없이 치러진 예식과 이어진 피로연까지 장장 4시간에 걸친 결혼식이 무사히 끝났다.

신랑이나 신부 중 누군가 도망만 안 간다면, 결혼식은 실패 없는 100% 성공의 대박 공연이다. 그 주인공이 연예인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차려진 음식이 맛있고 없고, 주례가 길건 짧건 간에 결혼식에서는 하나에서 둘이 되며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의 클라이맥스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 흔들리지 않고 살겠느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면 로맨스의 포텐이 터지면서 주인공과 하객들 사이엔 미래에 대한 더할 수 없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고 주인공은 지켜갈 것이다.

다시 6시간 동안 몸을 실은 버스 안은 체력 좋은 아주머니들의 수다, 무지 불편한 의자, 그 비싼 코스요리에도 금세 허기져가는 위장, 젊은 하객 부부의 갓난아기가 우렁차게 울어대는 소리로 차있다. 비로소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K양 부부는 곧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겠지, 그녀라면 능히 그조차도 즐거워하겠지만. 예식장을 장식한 생화들이 너무 탐스러웠는데, 하객들에게 곱게 포장해주었다. 받아오고 보니, 화사한 백장미 한 다발이 부케처럼 보인다. 10년 만의 외출에 대한 보답치고는 꽤 유혹적인 선물이다.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