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는 간결했지만 단호했다. "우리 아파트에 더는 자살이 없게 해주세요." 그녀가 부녀회장으로 있는 그 아파트에서 한 달에 한 명꼴로 알코올로 인한 자살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그 임대아파트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행복마을사업 대상지로 지정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사업을 꼭 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행복마을 사업은 개발의 과정에 소외된 도심지의 틈새마을에 주민주도형 마을만들기사업을 지원하는 부산시의 시책으로, 2010년도부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민들의 희망이 주로 마을 공동체시설이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물리적 사업이 많았던 탓에, 자살예방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L 회장의 요구는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심사위원 간에도 다소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이 아파트 요구 금액이 통상 지원예산의 4분의 1 정도이니 한번 믿어보고 지원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행복마을 사업평가를 위해 모인 자리에 L 회장이 아주 밝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1년간 우리 아파트에 자살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참석자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아 바로 이거다' 싶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랬다.
우선 아파트 상가건물 내에 빈 점포를 관리회사를 설득해 무상으로 빌렸다. 점포를 예쁘게 꾸미고 구청 보건소와 전문단체의 지원을 받아 자살예방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여하는 사람이 몇 명 안 됐다. 그러나 반상회 등을 통해 꾸준히 홍보를 한 결과 점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었다. 또 참여자들의 담당자를 지정해 지속적으로 상담하고 관리했다. 그랬더니 효과가 기대이상으로 나타났다. 자살예방 교육과 공동체의 배려감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지 이렇게 효과가 나타나리라고 스스로도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한 해 평균 5000여 명인데 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그 3배인 1만5000명이다. 게다가 자살 증가속도도 20년 만에 3배나 늘었다. 이쯤되면 복지 중에도 가장 시급한 복지가 스스로 목숨 끊을 생각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복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질풍노도의 대학 1학년 사회학도 시절. 기능주의적 사회학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던 때에 프랑스 혁명과 급속한 산업화 이후 프랑스 사회의 엄청난 자살증가를 분석한 뒤르켐이라는 사회학자의 자살유형 분류가 꽤나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있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anomie) 자살이 그의 자살유형 분류다. 그 중 아노미적 자살은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그의 분석은 당시 혼란한 시대상을 자살이라는 현상을 통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살을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로 보고 있는 점이 퍽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그렇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개인적일지라도 원인은 사회적 측면이 많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자살의 원인만해도 그렇다. 불평등 격차에 따른 생활고, 가족의 해체에 따른 공동체 관계망의 손상, 고령화에 따른 건강하지 못한 노년의 절망 등이 먼 이유(遠因)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우울감 등 정신과적 증상,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절박한 경제적 문제 등은 가까운 이유(近因)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직접적 계기는 음주와 관련이 많다. 정부가 최초로 작성한 자살통계에 따르면 자살시도자의 44%가 음주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L 회장은 통계가 아니라 경험과 직감으로 음주와 자살의 상관관계를 체득하고, 그 불행한 관계의 고리를 끊고자 용기있게 공동체의 이름으로 관심의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최근 서울의 성북구, 전북 진안군 등의 지자체에서 자살위험이 있는 취약층을 찾아내 전문 상담인력을 붙여줘 자살률을 떨어뜨린 사례는 이와 유사한 긴급구조망의 한 사례이다. 따라서 L부녀회장의 아파트단지 사례는 지역복지시스템과 연동된 지속가능한 성공사례로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전문적으로 얘기하자면 취약성의 위기(vulnerability)를 공동체성(community)으로 극복한 것이다.
그런데 L 회장은 이제 급한 불은 껐지만 그 다음 숙제가 또 있다고 했다. 아파트 인근의 술집에 기초생활수급자들이 급여통장을 아예 맡겨놓고 술을 먹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들 술집과 일전을 벌여야한다는 것이었다. L 회장의 승전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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