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한일관계가 드디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인가? 네덜란드 핵안보정상회에 참석 중인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 내일 오바마 미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처음으로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예전에 외교부 후배들에게 일 잘하는 요령을 탁구에 비유한 적이 있다. 업무를 끌어안고 있지 말고 오는 대로 바로바로 액션을 해서 상대방 코트로 넘기는 게 좋다고. 그래서 자기 코트는 항상 말끔히 비어 있어야 한다고.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하느라 허덕이기 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상황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지난주에 아베 정부가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확언했고, 핵안보정상회의 직후인 3월 26일로 예정됐던 일본 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다음 달로 연기했다.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한 국장급 협의까지 타진해 왔다. 이제 일본으로부터 넘어온 공을 한국이 처리할 순서다. 우선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관계회복의 계기를 만들되, 한일 양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향후 일본의 대응을 좀 더 지켜보는 한편, 한걸음 나아가 한중일 3국 간 정상회담을 한국이 제안해 상황을 주도하는 방안을 추진해 보자.
첫째, 한일관계의 전면적 경색국면이 장기간 계속되는 것은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미일 정상회담을 한일 간의 어색한 대치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아무리 일본의 비중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한국에는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임에 틀림없다.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나 통일대박론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도 주변정세를 우호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주변국들이 빠짐없이 지지하고 성원해 주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통화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웃 나라와의 우호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둘째, 그렇지만 한일 양국 정상회담 개최는 아직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아베 정부는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노담화 검증작업을 추진하겠다는 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는데도 한국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억지로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 고노담화라고 하는 보수우파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로는 한일관계의 타개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일본이 교과서 검정 발표를 연기했다고 하지만 독도나 역사인식 문제에서 개선이 이뤄진 것은 아니고, 외교청서나 방위백서의 독도 영유권 주장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과거사 문제를 비교적 조용히 다뤄오던 중국 정부가 위안부나 강제징용자 문제를 표면화할 조짐도 보인다. 한국보다 훨씬 더 반일감정이 강한 중국에서 과거사 문제에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특효약을 기대하기 보다는 성인병을 다스리듯 길게 보며 관리해 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역사문제와 같이 원칙을 지켜야 할 분야는 엄하게 따지고, 안보나 경제와 같이 서로에게 실리가 있는 분야는 협력해 나가는 '분리대응'을 기조로 삼아야 한다. 따질 것은 따지되 협력할 것은 협력한다는 발상이다. 따질 것을 따지지도 않고 협력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따지기만 하고 협력을 외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과 병행해 한중 정상회담도 개최하기로 한 것은 외교적 균형을 잡는다는 점에서 적절했다. 여기서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개최를 한국이 제안했으면 한다. 아베 정권의 퇴행적 역사인식에 대한 한중 양국의 반발 때문에 2008년부터 매년 열리던 한중일 정상회담이 작년에는 개최되지 못했다.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지금이야 말로 한국이 대담한 이니셔티브를 발휘해 능동적으로 상황을 주도할 기회다.
서로가 껄끄럽고 불편한 의제는 빼고 환경, 에너지, 인적교류와 같은 부드러운 이슈로 정상회담 의제를 한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 보자. 그리고 한일, 중일 양자회담의 개최가 부담된다면 이번에는 3국 정상회담만 하고 별도의 양자회담은 갖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또한 한국에서 개최하면 중국도 일본도 당일치기 방문이 가능하다. 그러면 3국 정상이 부드러운 의제로 한정해 별도의 양자회담 없이 당일치기로 간소하게 정상회담만 하고 헤어질 수 있다. 한미일 정상회담이냐 한일 정상회담이냐 하는 좁은 틀에 갇혀있지 말고 한중일 정상회담까지 포함해서 크고 넓게 보자.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부 동북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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