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 며칠 휴가를 얻어 소위 '방콕'(방에 콕 박혀 있다는 말)을 했다. 마치 개구리가 동면을 취하듯 말이다. 페이스북도 접고 메일 확인도 하지 않고 서점에서 구입한 다섯 권의 책과 함께 '진공상태'를 즐겼다. 정신없이 뛰어 다녔던 지난 1년은 과연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또 그렇게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등등 나름 '철학자'도 되어 보았다. 사람들이 왜 어느 한순간 홀연히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현실로 페이드인해 새해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데 어느 새 '방콕'의 문이 떡하니 다시 열렸다. 시시하게 들리겠지만, 필자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가족은 불만이었겠지만….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해묵은 우리 사회의 갈등은 멈출 줄을 모른다. 기세를 한껏 모아 또 한바탕의 결전을 치르기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적막감마저 든다. 연말을 뜨겁게 달구었던 철도노조 파업과 경찰의 대규모 진압, 국정원 개혁을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대립,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 표출과 장외투쟁 등 복잡하게 얽힌 분노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정도의 원인을 생각해 본다. 먼저, '몫에 대한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대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산업화 세력은 자신들의 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경제강국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투쟁만 하던 '삐딱한' 사람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의 몫을 너무 요구하고 있다고 불만이다. 이에 반해,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운동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민주화 세력들의 눈으로 보면 '아직 민주화조차 되지 않은' 산업화 세력들과 덩그러니 같이 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로를 근본부터 인정하지 않으니 상호 증오만 난무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득과 타협이란 단어는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원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과거와의 전쟁'이다. 일제시대 때 친일하던 사람들이 청산되지 않고 해방 후에도 위정을 하다 보니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견해, 군사독재시절 때 각종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부정적 시각과 그 당시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의 한맺힌 절규, 그리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진 진보정권에 대한 색깔논쟁 등 과거에 대한 인식이 각 정치세력 간의 입장에 따라 극단적인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도 철저히 과거에 얽매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장차 대한민국이 목표로 해야 할 '미래비전의 결여'일 것이다. 지금의 정치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정권창출과 개인적 입신을 위한 이전투구만 있을 뿐이다.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강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하는 모습을 보며 탄식하는 유권자들이 여전히 이에 대해 관대하든지 아니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 선거 때가 되면, 투표를 하지 않거나 지역으로 나뉘어 무조건 표를 몰아주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는 한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 줄 미래의 한국에 대한 진정한 토론은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과거와의 결별'이고 상대방을 품어주는 '치유의 눈물'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위대한 꿈을 향한 '진정성'과 이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이다. 이 삼박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오랜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연초에 '방콕'하며 읽었던 책에 "당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미래에 대한) 꿈 보다 클 때, 당신은 무덤을 향하게 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우리가 그간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억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고 한들, 앞으로의 대한민국에 대한 꿈이 없다면, 우리의 운명은 이 정도로 해서 하산 준비를 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아직 최고봉에도 올라보지 못했는데 하산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동서대 총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