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일본 도쿄에 살 때의 일이다. 체재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반드시 찾아야 했던 곳이 출입국관리국이었다. 10년이라는 일본 생활에서 가장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곳이다.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각종 비자 신청과 연장을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으로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중국인이나 동남아 사람들이 필자보다 먼저 순번대기표를 뽑은 날이면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각오해야 했다.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민원인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평소 친절하기로 소문난 일본사람들이지만 유독 출입국관리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슨 서류를 보충하라는 불친절한 말투는 물론이고 서투른 일본어를 하는 외국인에 대해 못 알아 듣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어린 아기를 업고 사정사정하던 한 필리핀 여성이 결국은 울며 창구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욱한 감정을 애써 삭인 적도 있다. 출입국관리국을 갔다 오면 '반일'이 된다는 이야기가 외국인들 사이에 회자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움트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대학에는 요즘 여름방학을 맞아 아시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로 넘쳐난다. 지난해 부산에서 개최된 '제11회 아시아 대학 총장회의'에서 부상하는 아시아시대에 걸맞은 국제적인 인재를 양성하자고 결의했고, 그 결과 '아시아여름학교(Asia Summer Program)'를 공동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올해 첫 개최지로 부산이 선정돼 지난 7월 3일부터 11개국 35개 대학생 400여 명이 모여 계절학기를 진행했다.
그러나 개학 날이 다가왔는데도 도착하지 않은 A국가 학생들이 있었다. 해당 학교에 문의해 보니, 한국 입국을 위한 비자를 현지 한국공관에 신청했는데, 준비 서류가 너무 많고 어렵사리 제출해도 깜깜무소식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A국은 국내 불법체류자가 많아 비자를 아주 선별적으로 내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개최 대학의 총장으로서 보증을 서겠다는 신원보증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신청자 22명 중 실제 비자를 받은 학생은 11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학기가 시작한 1주일 후에나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A국 현지에서 우수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재학생들인데도 말이다. 나중에 보니 이들 외에도 B국과 C국에서 온 학생들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한국입국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당한 수모를 다수 발신하고 있었다. 현지 한국영사관 창구에서 받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넋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사실 한국은 이제 더는 단일민족 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통계에 의하면 국내거주 외국인이 145만 명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그중에는 불법체류를 일삼고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한국인 배우자를 찾아서, 또는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고자, 아니면 한국이 좋아 한국에서 유학하고자 찾는 사람들이다. 물론 입국심사를 강화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비자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비자를 발급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신속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요즘 국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국가브랜드를 높이고자 여러 방면에서 노력 중이다. 인기가 치솟고 있는 한류를 활용하여 '멋있는 한국' 이미지를 만들려 하고 있고, 한국음식과 한국패션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막연하고 피상적인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개개인이 실제로 겪는 '시건방 한국'과 충돌하게 될 때 한국은 졸부 선진국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거만한 나라가 되어 우리보다 사정이 어려운 나라의 국민을 천대시하는 풍토가 자리 잡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리 국민이 선진국 대사관에서 서러움을 당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격이란 외국인들에 대한 존중과 겸손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좀 더 멋진 대한민국이 되어보자.
동서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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