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공동대표와 이석기 당선자 등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에 관한 당 진상조사위원회 조사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비례대표 당선자가 전원 사퇴해 말끔히 털고 가야 한다는 비당권파 주장과 쇄신이 없으면 지지의사를 철회하겠다는 민주노총의 최후통첩마저 거부하고 있다. 당권파 당원들의 단상 난입과 진상조사위원장 조준호 공동대표, 유시민 공동대표 등에 대한 폭력 행사 등으로 통진당 중앙위원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파행상황과 뉴스화면의 폭력행사 장면은 통진당 지지자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겼고 다수 국민에게는 상당한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진보진영에 비교적 호의적인 인터넷 공간에서조차도 당권을 수호하고 파행상황을 지연시켜 19대 국회에 어떻게든 진출하려는 무리수를 비난하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통진당 파문을 지켜보면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공산주의 혁명가 레닌을 되씹어보게 된다.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인간은 경험을 재료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 능력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 칸트는 목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타인의 인격 존중을 주장했고 자기만을 특권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했다.

반면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혁명의 필수조건으로 보았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투쟁이 뚜렷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귀족의 농민수탈로 인한 극심한 빈곤과 오래된 반목을 불씨로 삼아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레닌은 혁명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야 함을 역설했다. 결과를 위해선 비도덕적 비양심적인 수단의 선택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부정투표 사례를 실수로 보자고 하면서 "진보정당은 천상의 정당이 아니고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고 해명하는 모습에는 진보진영 논객들조차도 실망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이 통합진보당을 결성할 때 화학적 결합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국회 진출과 2012년 대선 승리라는 명분이 물리적 결합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최대지분을 지니고 있던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목적을 중시하는 NL계열과 가까운 이정희 공동대표가 당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성'이라는 수단을 중시하고 종북 노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유시민, 심상정, 조준호 공동대표 등 비당권파와 이정희 공동대표 등 당권파 사이의 이념적 지향점과 정치 노선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줄은 당 지지자는 물론, 민주통합당도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를 통해 12월 대선 승리를 추구하는 민주통합당은 통진당 사태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대선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작게는 130만 표 크게는 200만 표라는 진보진영 표를 확보하려다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게 될 가능성이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과 국정 운영방안에 대한 기본적 확인조차 제대로 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연합, 공동정부 구성 제안 등은 선거승리만을 위해 정치공학적 수단에 치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대선주자급이 되려면 국가관 안보관 경제관 등 집권의 목적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한 청년실업문제 해결책은 무엇이며 양극화 심화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짜보겠다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

통합진보당이 겸허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이 땅의 정치인들이 국민과 대한민국을 섬기는 정치를 제대로 해주기를 희망한다.

그들에게 칸트의 묘비명을 들려주고 싶다. '실천이성비판'의 유명한 구절로 돼 있는데,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인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